brunch

매거진 알란책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아나 Aug 16. 2023

지혜의 숲을 가다

읽은 책 :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

우리가 보낸 순간

정말 오랜만에 지혜의 숲에 왔다.

예전에 아이들이 유치원을 가고 나면 다이어리 하나 들고 왔던 곳. 뭔가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기면 와서 책장에 꽂힌 장서를 보며 깊은숨을 들이쉬면 편안해지던 곳.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가는 곳을 이곳이라고 했을 때 다들 웃었던 곳.

오랜만에 와서 책장을 훑어보니 그동안 꽤 편안한 삶을 살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읽을 책을 가지고 와도 되고 그냥 와도 되는, 이곳에서는 책이 준비물이 아니다. 노트북 하나 들고, 돋보기안경을 챙기고, 다이어리를 챙겼다. 다 챙긴 듯했는데 중요한 펜을 안 들고 왔다. 휴대폰에 끄적이자니 뭔가 불편하다. 매번 다이어리에 꽂혀있던 펜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아마 다른 연필꽂이에 꽂혀있으리라.



이곳이 많이 바뀐 듯하다. 예전에는 주차장에서 올라와 어떤 카페를 지나 복도를 쭉 걸어오면 지혜의 숲 도서관이었는데 이제는 그 이어진 공간이 갤러리로 바뀌었고 바깥으로 둘러 나와야 했다. 정말 너무 늦게 왔구나. 책이 예전보다는 낡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세월이 흘러 주차 시스템이 바뀌었고, 카페도 파스꾸치로 바뀌었다. 바뀌지 않은 건 앉은 의자와 책상, 그리고 책장. 그 책장에 담긴 책들은 바뀌었다. 아니, 그대로 있는 책들도 있겠지.


아직 방학이 끝나지 않는 학교도 있다. 우리 아이들은 개학을 해서 학교를 갔고 그중 하나는 성당에서 진행하는 캠프를 떠났다. 조용한 이곳에서 다른 아이들이 책장에서 책을 고르고 앉아 읽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아이들이 어려서 함께 왔던 시간들도 생각나고. 그 와중에 나는 커피를 또 한 잔 더 마실까 고민을 하고.



책장에 수많은 책들 중 오늘 읽을 책.

이라고 하지만 작가명을 보고 골랐다. 무수히 많은 책들 중 고르는 기준 중 하나가 작가, 문학상 수상작, 유명인의 추천작들. 김연수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책 제목이 딱히 기억나지 않지만 읽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글들이 많다.



- 우리가 사랑했던 순간의 또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은 영원히 우리 안에 남는다는 점이죠. 그런 까닭에 때로는 그게 훨씬 더 고통스럽기도 해요. 이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제가 좀 슬프겠죠. 그건 당신에게 사랑의 경험이 없다는 소리일 테니까.


할머니의 폭언을 듣고 엄마가 자신에게 한 말을 기억한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작품에 실린 글. 읽어봐야겠다.

이 책은 작가가 읽고 난 후의 느낌을 실은 책. 나는 이런 책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다른 작가의 글을 읽고 자신의 느낌을 실은 글들을 내가 다시 읽고 그 느낌을 다시 글로 작성하는 것. 지금 내가 하는 행위다.


이런 글이 있다.


- 30초 안에 소설을 잘 쓰는 법을 가르쳐드리죠. 봄에 대해서 쓰고 싶다면, 이번 봄에 무엇을 느꼈는지 쓰지 말고, 어떤 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느꼈는지를 쓰세요.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쓰지 마시고, 사랑했을 때 연인과 함께 걸었던 길, 먹었던 음식, 봤던 영화에 대해서 아주 세세하게 쓰세요....(중략)...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사람과 잊지 못할 음식을 드시고 그날의 기온과 눈에 띈 일들을 일기장에 적어놓으세요. -


아, 내가 그래서 소설을 못 쓰는구나. 느낌만 썼다. 그때의 느낌. 정말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랑하는 이들과의 함께 했을 때 기억나는 느낌은 어딘가를 걷고, 무언가를 먹고 했을 때 느꼈던 느낌을 더 오래 기억한다.


이 책은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말이 더 재미있다.

- 그러므로 쓰라. 재능으로 쓰지 말고, 재능이 생길 때까지 쓰라. 작가로서 쓰지 말고, 작가가 되기 위해서 쓰라. 비난하고 좌절하기 위해서 쓰지 말고, 기뻐하고 만족하기 위해서 쓰라. 고통 없이, 중단 없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세계 안에서, 지금 당장, 원하는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날마다 쓰라. -


고로, 나는 계속해서 쓰기로 했다.

원하는 삶을 위해.


<읽을 책>

1. 기쿠다 미쓰요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2. 김연수 내가 이직 아이였을 때


매거진의 이전글 키키키린 [그녀가 남긴 120가지 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