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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월 Jan 05. 2024

모차르트

—나를 풀어 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년 1월 27일~1791년 12월 5일)

출생: 1756년 1월 27일, 신성로마제국*(독일) 찰츠부르크(현 오스트리아) 게트라이데 거리 9번지 [여전히 보전된] 모차르트 생가 

사망: 1791년 12월 5일, 오스트리아 빈 Mozart-Sterbehaus(Mozart death house)



모차르트라니. 

모차르트를 먼저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좋다. 모차르트는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무수하고 아름다운 찬사와 추천사들에 뭘 더 보태는 건 무익할 뿐 아니라 해로울 것이다. 나는 그저 그의 음악이 짱 좋다, 아름답다는 것에 보태어 그를 내가 매혹되는 바하**나 우러르는 베토벤에 앞세우는 까닭만을 짧게 쓰려고 한다. 

그것도 새로운 말을 보태지 않고자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기고 싶다. 


레기날드 링엔바하(Reginard Ringenbach)는 이렇게 썼다. 



나는 모차르트가 우리에게 그의 음악을 하나의 선물로서 아무런 제한 없이 위탁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또한 덧붙여야 한다, 그의 음악은, 흔히 주장되는 것같이 그렇게 빨리, 그리고 쉽게 자신을 우리에게 열지 않는다고. 그러나 그 근거는 그의 음악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것을 감히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는, 또는 그렇게 할 수 없는 듣는 사람에게 놓여 있다 : 그는 자신을 그의 음악에다 내어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되면 음악도 자신을 내어줄 수 없다. 그러나 오로지 선사되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들을 귀가 없는 사람, 그것을 받아들일 가슴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자취를 감춘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바로 이러하다. 


그때 다른 사람들이 밀고들어와서, 우리를 강요하고, 우리를 유혹하려 하며, 아첨하며, 심지어 우리 맘에 들기 위해 자신을 비하하는 데까지 이른다. 작곡가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들조차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해석자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랴!). 베토벤이 웰링톤의 명예를 위해 작곡한 행진곡은 천둥소리를 울리는 무의미 이외에 과연 무엇인가? 베토벤의 아주 위대한 작품들, 예컨대 ‘환희의 송가’를 포함한 제9교향곡에서도 자유로움을 느끼기 어렵다. 즉,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안단테’는 나를 들쑤셔대고, ‘피날레’에서 나는 찢겨지고, 열광 중에 음악회장을 떠나지만, 나의 기쁨 속에는 어떤 불만이 뒤섞여 있다 : 마치 사람들이 내게 폭행을 가한 것 같은 느낌이 남아 있다. 물론 나는 베토벤 전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악사중주를 생각하기만 해도, 내가 든 예를 전체 작품에로 확대할 경우, 그것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겠는가를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파의 음악은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주는 모차르트의 음악과는 아주 다르게, 일반적으로 자신을 “떠맡기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그것은 마침내 바그너에서 절정을 이룬다 : 완전한 해방을 자처하는 그 거인을 우리는 경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엄격한 말뜻에서 그를 사랑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음악에 의해 사랑받고 있는가? 나는 많은 작곡가들이 우리를 그의 음악 속에 가두어 놓는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고, 표현할 것이 있고, 알릴 만한 무엇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너무나 종종, 자기 자신에로, 자신의 인격, 자신의 천재에로 되돌아간다. 그가 위대한 천재일 경우, 우리는 억압당하고, 얽매인다는 것을 나는 반복해 말한다. 억압하지 않으려면, 해방시키려면, 훨씬 더 위대한 천재가 필요하다. 


― 레기날드 링엔바하 지음, 『하느님은 음악이시다』, 김문환 옮김, 분도출판사 펴냄, 1993년(재쇄, 초판: 1988년), 38-40쪽. 


그러니까 모차르트는 “훨씬 더 위대한 천재”다. 

다름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를 “해방시키려면”. 


링엔바하는 또 모차르트의 음악은 ‘내용’이 아니라 차라리 ‘길’이라고도 한다. 


모차르트는 해방시키는데, 내버리고 내던지는 무책임한 방기(放棄)가 아니다. 배출(排出)이 아니다. 부자가 되는 자유, 그러니까 거지가 될 자유! 이게 아니다. 

모차르트는 길이다. “다른 어떤 곳에로” 이르는 길. 

따라가 본다. 

다다르지 않았고, 그래서 알지 못하고, 다녀온 이들의 증언도 부족하지만(혹은 넘치는데 못 미덥지만) 따라가 보는 건, 막귀 주제에 그의 전곡을 쓸어듣고, 역시나 모자라 다시 드문드문 찾아듣게 되어도 또 가고, 또 가고, ‘이 길인가?’ 하는 것은 링엔바하의 같은 저작 첫머리에서 마주친 모차르트의 격려(?)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한다면 

공격하라 


꼭 필요하다면 

방어하라 


그러나 결코 

결코 경멸하지 말라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라 




이 미치광이는 

나를 풀어준다. 

거기 있게도, 떠나게도 

다 괜찮게 한다. 


모차르트는 당신도 해방시킬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은 모차르트 사후 1806년 해체되었고, 찰츠부르크와 빈 모두 현재의 오스트리아에 위치했으나, 당대의 다른 사람들처럼 모차르트는 스스로를 ‘독일인’이라고 생각했을 공산이 크다. 독일인과 독일-오스트리아인은 거의 같게 생각되어졌다고 한다. 


**Bach를 외래어표기법에서 ‘바흐’로 옮기게 하지만 독일어의 발음은 ch로 끝나는 명사의 종말음을 그 직전 모음을 따르는 게 상례여서 바하가 더 실제 발음을 보여 주는 표기입니다. 저는 때에 따라 바흐와 바하 두 개 표기를 오가며 쓰고 있습니다. 어느 쪽도 식별에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이 글은 ‘취향’에 대한 글인 만큼 선호하는 대로 적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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