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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월 Jan 19. 2024

아이작 아시모프

—과학 사제(司祭). 지난 세기의 제사장, 다음 세기의 예언자


아이작 아시모프

상상의 원점에 대하여. 

거꾸로, 지평선처럼 물러나는 도착점에 대하여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1920년 1월 2일(추정) 러시아 스몰렌스크 현 페트로비치(Петровичи, Petrovichi)에서 출생

1992년 4월 6일 미국 New York에서 사망 

3세에 부모와 함께 러시아를 떠나 미국에 정착, 보스턴대학교 생화학교수로 재직 

학자이자 소설가, 다양한 분야의 저술가 


나는 <파운데이션>을 보고 자랐다. 


처음은 얇은 과학교양서였다.

‘무엇인가’ 시리즈에서 딱 한 권 『세균이란 무엇인가』만 보았을 뿐이지만 

나는 저자의 이름을 머리에 새겨 두었다. 

(과학교육사가 펴낸 책에는 저자 이름을 아이작 아시모’브’라고 적었다.) 

그리고 현대정보문화사가 열 권으로 펴낸 

(원작의 발표 순서대로 정리한 최신 발매본(황금가지 펴냄)과 달리 

그때는 작품 속 연대를 따라 순서대로 펼쳐 놓았다) 파운데이션에 이어서 

세계관을 공유하는 ‘로봇’ 시리즈나 ‘로봇과 제국’을 읽었고, 

나중에는 ‘우주’ 시리즈도 보았다. 

사이사이 아시모프가 써낸 방대한 장편들을 읽고 

성경에 대한 책과 

글쓰기에 대한 그의 책도 읽었다. 

아시모프는 거의 모든 것에 관해 글을 쓴 사람이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처럼 모든 분야에 정통하고 일가를 이룬 사상가라고는 못하겠다. 

그보다 아시모프는 우직한 사람이 영리함과 성실함을 갖춘 경우다. 

그는 과학을 숭상했고 

합리성에 대한 깊은 믿음을 품고 있었다. 

그는 진정한 인문주의자, 인간중심주의자 즉,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인간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작품 속에서 사회와 문명에 대해 진지하고 유쾌한 사고 실험을 행했다. 

『이백 년을 산 사나이』는 영화 <바이센티니얼 맨>으로 만들어졌고, 

그의 작품들을 모으고 변주해서 <아이, 로봇> 같은 영화도 만들어졌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소설 속에서 ‘로봇 공학의 3원칙’을 만들었는데 

이는 실제 로봇 공학에도 거의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그는 인간과 다른 존재를, 인간과 닮은 존재를 등장시키고 

인간이 되려는 존재, 인간을 지키려는 존재와 시도 등을 그려내며 

끊임없이 ‘인간이란 무엇인가’ 상상하고, 이해하고, 질문한다. 


그러나 그가 휴머니스트인 까닭은 단지 ‘인간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혐오하거나 파괴할 만큼 적대해도 관심은 가질 수 있으니까.


그는 이 관심에 이어서, 꾸준한 관심에서 뻗어나간 낙관론을 펼친다. 

인간 본성과 인간의 미래 즉, 인간이 선택하고 해 나갈 행동이 좋은 결과에 이를 거라는 낙관론은 

그가 쓴 모든 종류의 글에서 발견된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그의 세상관, 인간관은 


프랑스의 프란치스칸 수사이자 사제인 엘르와 르끌레르가 쓴 책 『가난한 자의 슬기』의 절정부와 대칭을 이룬다. 이 책의 절정은 번뇌하던 거룩한 사람 프란치스코가 마침내 평화를 얻으며 내뱉은 외침인데, 바로 


“하느님이 계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외침은 상상이지만, 충실한 연구와 애정의 결과 열린 그럼직한 묘사다. 


천년 전 중세 수도사가 하느님을 통해 온 세상을 사랑한 것처럼 

아시모프라는 휴머니스트는 인간을 통해 마침내 온 세상을 긍정한다. 


다만 그의 최고 명작 파운데이션은 이 대체 미래 역사의 마지막에 

인간이 거주하는 은하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골란 트래비스가 유일하게 느끼는 불안을 통해 

맹목적 신념이 아니라 

지키고자 하는 신념, 의심하고 검증하고 그래서 계속해서 조종대를 붙잡고 가야 한다는 암시를 담고 있다. 


트래비스가 두려워하는 건 

인간에게서 나고,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에 의해 변한 새로운 인간이다. 


스티븐 호킹이 인류에게 남긴 유언이자 경고를 함께 떠올리게 한다. 


호킹은 생전 

외계인은 걱정하지 마라, 성간을 넘나들 정도의 문명이라면 

자멸하지 않는 유일한 길, 평화를 정착한 이들일 것,이라고 명쾌하게 불안을 잘라 주었다. 

그리고 한 가지 위험을 경고하였는데 

“인공지능을 만들지 마라”는 것.


현재 열광하는 인공지능은 진정한 의미의 인공지능은 아니다. 

유사지능이지 완전한 지능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지능으로 가는 길에 놓인 건 맞는 것 같다. 


로댕은 <생각하는 사람>을 <지옥문>의 한 켠에 새겨 두었다. 


기성의 로봇은 우리 육체를 움직이지 않게 했고, 

무술가나 활동적인 운동가를 실망시키기는 해도 

인간성을 곧장 해치지 않았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바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생각한다’


우리는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고, 곧, 이해하거나 결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 수고를 싫어해서 

수고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잊고 있다.


인간을 낙관한 아시모프는 

우리가 여전히 ‘수고’하기를 바란다. 

괴롭지 않은 게 행복이라는 게으른 낙관이 아니다.

그는 싸우는 인류, 고민하는 인류를 지지한다. 


그는 여전히 인간을 믿은 채, 낙관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영면에 들기 전에 인간을 비관하게 할 유일한 가능성에 대해 

실마리를 남겨 두었다. 


파운데이션 연작의 심리역사학을 비롯해서 

여러 설정과 전개는 

살짝 어린 연배인 거의 동시대를 산 작가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그는 표절 아닌 표절, 즐거운 비판적 비추기와 비틀기로 

물론 그 내적 독창성과 방대한 인용은 그 자신이 정당한 수고의 열매를 받을 수 있게 하지만 

아무튼 감추지 않고 드러낸 바 <듄> 연작을 가능하게 했다. 


아시모프가 좀 더 ‘이성’에 무게를 두는 동안 

프랭크 허버트는 인간의 ‘직관’과 ‘의지’에서 이야기의 동력을 찾아냈다.

상관없다.

왼발이든 오른발이든 뻗으면 남은 한 발이 같이 가는 거다. 


아시모프는 내게 상상하기, 생각하기에 한 원점을 제공해 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정합적 설명을 꿈꾼다. 

‘신비’도 내적 문법을 갖추어 계속해서 생활하고 생성하리라 

그렇게 기대하게 한다. 


아시모프를 분석할 뜻은 없다. 

너무 번잡하고 방대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가 나에게 어떤 사람인지 

조금, 살짝 이야기해 보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당신은 

꼭 


아시모프를 읽도록 하라. 


그런 즐거움은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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