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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월 Mar 15. 2024

— 덜고 담고




나는 컵이 좋다. 


비어 있다가 무언가를 담고 

향이 퍼지며  

가까이 다가가면 투명하든 짙거나 옅게 색을 띠든 

질감과 색감이 보이고 

작은 운동감도 느껴진다. 

곁에 두면 손을 대어 온기를 나눌 수 있다. 


때론 후각과 시각, 촉각을 통해 받는 온도가 

예측을 벗어나 놀라기도 하고 

빤한 그 모든 게 너무 만족스러워 놀라기도 한다. 


환(丸)이나 사탕, 초콜릿 따위가 담기거나 

누군가 접어 넣은 종이학을 마주치기도 한다. 


그리고 비었을 때, 이전의 잔향과 

대기를 따라 높거나 낮아진, 그러니까 따뜻하거나 차가운 

돌인데 천 같은 미묘한 감촉을 만난다. 


컵을 집어 들던 첫 기억을 떠올려 준다. 


컵은 컵이 마주친 전부와 

컵은 모르고 컵을 쥔 손이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문득 문득 떠올려 준다. 

예고도 없이 

조짐도 없이 


그러나 언제나 살짝 

환기할 만큼만 놀래키며. 


이 작은 사치는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채 

언제나 

두어도 

잠시 잊어도 

상관없이 


나를 지켜본다. 


어느 사물이든 그럴 수 있지만 

그렇게 여기든 말든 


직접 고른 컵, 

아니라도 

내 컵이라고 기억하는 컵은 

이런 신기한 일을 

군말없이 한다. 


생색내지 않고. 



나는 컵이 좋다. 

당신은 어떤가? 



P.S. 쉿, 찻잔 속에는 태풍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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