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덜고 담고
나는 컵이 좋다.
비어 있다가 무언가를 담고
향이 퍼지며
가까이 다가가면 투명하든 짙거나 옅게 색을 띠든
질감과 색감이 보이고
작은 운동감도 느껴진다.
곁에 두면 손을 대어 온기를 나눌 수 있다.
때론 후각과 시각, 촉각을 통해 받는 온도가
예측을 벗어나 놀라기도 하고
빤한 그 모든 게 너무 만족스러워 놀라기도 한다.
환(丸)이나 사탕, 초콜릿 따위가 담기거나
누군가 접어 넣은 종이학을 마주치기도 한다.
그리고 비었을 때, 이전의 잔향과
대기를 따라 높거나 낮아진, 그러니까 따뜻하거나 차가운
돌인데 천 같은 미묘한 감촉을 만난다.
컵을 집어 들던 첫 기억을 떠올려 준다.
컵은 컵이 마주친 전부와
컵은 모르고 컵을 쥔 손이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문득 문득 떠올려 준다.
예고도 없이
조짐도 없이
그러나 언제나 살짝
환기할 만큼만 놀래키며.
이 작은 사치는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채
언제나
두어도
잠시 잊어도
상관없이
나를 지켜본다.
어느 사물이든 그럴 수 있지만
그렇게 여기든 말든
직접 고른 컵,
아니라도
내 컵이라고 기억하는 컵은
이런 신기한 일을
군말없이 한다.
생색내지 않고.
나는 컵이 좋다.
당신은 어떤가?
P.S. 쉿, 찻잔 속에는 태풍이 산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