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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월 Apr 02. 2024

왜 우느냐?

— 모르겠습니다.




생의 시련 속에서 슬픔이 북받칠 때나

때론 무감한 채로도 몸이 저 혼자 알고 서럽게 녹아 흐를 때가 있습니다.

가슴속 빙하가 이렇게도 컸던지 놀라 겁이 덜컥 들 만큼

그러나 온세상이 잠긴대도 그게 무슨 대수랴 싶도록

그치지도 마르지도 않게

녹아 흐를지도 모릅니다.

그러고도 그 폭포는 맹렬하게 굽이치고 소용돌이치며

펄펄 끓고 온마음을 또 차갑게 얼릴 것입니다.

당신을 할퀴고 주변을 찌를 것입니다.


왜 우십니까?

— 그리고 당신은 여인입니다. 이 순간 당신의 남성원리는 허위이고 가면이며 우연하고 흉내낸 것임이 탄로납니다.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존재를 빚진 온세상이, 피시스[physis]의 세계 전부와 전체가 여성원리입니다. 이걸 받아들여야 당신은 세상을 낳고 자신을 새롭게, 온전하게 할 것입니다. 노모스[nomos]는 위로부터 와서 아래에서 다시 태어납니다. —


당신이 우는 까닭은 소중한 것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당신이 우는 까닭은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소중한 것을 잃고도 당신은 의연했습니다. 힘을 짜내 버텼고, 다음을 생각했으며, 할 일을 찾아 바로 지금 여기로 왔습니다.

당신의 고통 속에는 달콤함마저 있습니다. 당신의 기쁨이 사라진 뒤 그 사라진, 죽어 버린 전능에 대해 이번에는 당신이 전능하기에. 할 수 있는 애도와 당신이 알고 떠올리는 장례가 있기에. 그 달콤함에 당신은 어둠을 뚫고 언덕을 달려 올라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당신은 웁니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슬픔이, 무력이, 사라진 권능과 길이, 당신을 오열케 할 것입니다. 아니, 차라리, 당신이 눈물입니다. 여인아, 너의 이름이 울음이구나.


그러므로 당신이 진정한다면, 그럴 수 있는 품성이, 사라진 기쁨에 의해 그래도 예비되어 있다면, 겨울이 당신이란 땅, 피시스에 씨앗을 남겼다면 천사가 묻습니다.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오, 제발! 당신은 반드시 그렇게 들어야 합니다. 당신이 여지껏 ‘무엇’을 찾고 있다면 당신은 망한 겁니다. 아직도 거짓에 잠겨 있으면서 가짜 상실을 겪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당신의 고통조차 당신이 철저히 무지한 심연일 뿐입니다. 당신은 다시 제자리에 서고 맙니다.

그러나 기쁘게도, 당신이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는 물음을 듣는다면

도시 영문을 모르고서라도 간절히 누구를 찾는다면

나는 감사히 달음질치겠습니다. 재라도 마시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간직한 가장 은밀한 욕망을 내뱉을 차례입니다. 어쩌면 당신 스스로에게도 감추어져 있던 짙은 너울을 손 닿아 벗겨낼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묻습니다.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어디? 어디라고? 당신이 알 수 있다고?

들어서 알 거라고?

알겠다고? 알 수 있을 거라고?

기어이 알고 말겠다고?


그리고 당신의 마지막 말이 튀어나올 터이지요.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이것입니다.

당신의 숨은 욕망은.

당신이 알려고 애쓴 까닭은.

당신이 하겠다는 겁니다.

마주쳐 놓고도

살아 겪고서도

그래서 슬퍼하고 으스러지게 아프면서도

이 달콤함을 감추고서 손에 꽉 쥐고

파고든 손톱이 다시 살에 묻혀 붙어 버리도록 깊이

콱 쥐고 놓지 않았습니다.

내가 할 거라고,

내 기쁨은 내가 모시겠다고.

네 통제 안에, 내 소유로.

나의 거짓 권능을 진짜로 느끼며

온세상과 나를, 그럼으로써 피시스와 노모스를 단절하고 잇지 않겠다고

그걸 두려워하지만 차라리 가짜로 살겠다고

진짜로 죽느니 가짜로 살겠다고

악을 부리는 겁니다. 악다구니를 씁니다.


가엾어라, 당신.

우린 잃었습니다.

잃게 하였지요.


참, 당신 이름을 아시나요?

피시스 속에서도 노모스인 것, 당신을 끝없이 환기하는 것

당신을 무어라 말고

누구라 부르는지 기억하나요?


“……“


그때 당신이 돌아서겠지요.

그때 당신이 처음의 올바른 관계로 돌아가겠지요.

착각 대신 실제를 믿고,

보고 듣고 배우며

고쳐 가겠지요.


당신의 기쁨이 거짓 희망을 부수며

말할 겁니다.

붙잡지 마라고, 자기 갈 길을 갈 거라고.

하지만 그때 비로소 당신은 고백할 겁니다.

처음부터 충분했던 대로 충만하게


내가 내 기쁨을 만났다.


이 선명한 영원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고

사라지지 않고 빼앗기지 않으며

길 잃지 않는 것임을 알고

평안해질 겁니다.


당신은 찾지 않고 누리겠지요.

헤매거나 할 일에 짓눌리지 않고

할 일을 하며

멍에가 가볍고 짐이 편한 줄을 알 것입니다.

당신은 그제야

소유할 수 없고 기쁘다고

왜냐하면

무엇이 아니라

누구라는 확증을 본 것이기에,

그렇게 기쁨에 차서 떨며 말할 것입니다.

죽음도 전쟁도 그 어떤 파멸, 죽음에 이르는 고통도  

당신의 기쁨을 앗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요한복음 20장 17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요한복음 20장 13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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