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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월 Apr 12. 2024

읽어라, 이야기하라

들어라, 쓰라, 말하라, 그다음


구약의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은 그저

이야기 나누고

평범하게 안내하거나 요구하였다.

그 지시는 말 그대로 가리켜보이는 것

아브라함이든 그의 아브람 시절이든

말귀를 못 알아들을 거란 걱정 따위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모세와 여호수아(그리스식으로는 예수다) 시절에는

“들어라”(쉐마) 하고 요구한다, 반복한다.

안 듣는 거다.

그래도 들으면 알아들을 거라 여긴 거다.

알아들었으면 행하리라 여긴 거다.


예수가 온 신약에 이르면

“말하라” 요구한다.

어떻게 말할 거다. 어떻게 말하는구나, 예시하고

이렇게, 이거를 말해라.

— 닭이 세 번 울기 전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힐 것이다, [네가 유다인의 왕이냐는 빌리도의 말에] 네가 그렇게 말했다, 땅끝까지 선포히여라 —


아라비아 사막에서 무함마드를 만나며는

알라-하느님의 요구는 달라진다.

꾸란의 시작이다.

“쓰라“

쓰며 새기지 않으면

생각하지도 행하지도 듣지도 못하기에.


인문의 시대에 인간은 스스로

“읽으라”와 “읽지 마라”를 번갈아 또 동시에 요구한다.


나는 읽으란 말을 좋아한다.

그 말은 사랑한단 말이다.

발전하란 요구이며

너는 더 커지고 참되질 거라는 믿음이요 희망의 초대다.


읽기는 쓰기이며

읽고 쓰기는 이야기하기이고

이야기하기는 살기이며

우리는 사는 존재요

읽고 쓰고 이야기하는 즉,

함께 사는 이들이다.


읽어라.

책, 사람, 생, 세계, 시간과 법칙, 마침내

로고스—뜻을 읽어서

함께 살자.

아니면 우리는 함께 살지 못한다.

우리는 함께-사는-이인 까닭에

함께 살지 못한다는 건

단순 불능, 소멸이 아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이를 수 없는

무제한으로 계속해서 초과하는 괴로움이다.


어떤 핑계나 망상으로도

함께 살기를 그치지 말 것.

그러려면,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부디


“읽어라”


같이 읽을 테니.

— 위로요 경계로서.

— 안내요 모험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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