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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안다-숲의 소실점을 향해

숲에서 숲으로, 더 깊은 숲으로

by 녹턴

별점: ★★★★☆

추천 대상: 잡생각이 많고 조용하고 세심한 분들이 좋아할 것 같다..


정신없는 하루하루가 정신없게 흘러간다. 시간이 왜 이리 빠른 건지, 해야 할 일들을 쳐내다 보니 벌써 연말이 다가온다. 현실에서 벗어나 여유를 찾고 싶을 때 서점을 방문한다.



월곡역 인근에 있는 ‘갑을문고’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서점이다. 편집자들이 구획마다 책을 골라놓았는데, 대충 보고 진열한 게 아니라 꼼꼼히 살피고 읽어본 흔적이 느껴진다. 무슨 책을 먼저 읽고 그 다음엔 무얼 읽어야 할지 순서가 화살표로 나타나 있고, 책마다 감상평이 메모로 남아있다. 화살표와 남겨진 메모를 따라가다 보면, 책을 오랫동안 읽은 사람에게 하나하나 안내받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는 보통 아무런 생각 없이 가 편집자들이 이끄는 방향대로 움직여 책을 고르곤 한다.


이번에는 양안다 시인의 ‘숲의 소실점을 향해’를 골랐다. 문창과 친구가 추천해준 시인이기도 했고, 초록색 표지가 마음에 이끌렸다.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도 좋아 보였지만, 메모의 멘트가 마음에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시가 길어서 처음엔 읽는게 어려웠다. 나는 성격이 급해서 빨리빨리 읽고 넘어가는 걸 선호하는데, 양안다의 시는 긴 호흡으로 천천히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여유로울 때 시집을 꺼내 읽고 싶은 부분만 조금씩 읽었던 것 같다.


한 편 두 편 읽다 보니, 시의 특징이나 문체가 강하게 느껴졌다. 우선 모든 시가 산문시같이 긴 줄글로 되어있다. 그런데 시가 한 얘기만 이어나가지 않는다. 마치 영화에서 한 씬을 보여주다가 다른 씬을 보여주고 다시 다른 씬을 보여주는 플래시백같이, 여러 이미지가 중첩되어 나온다. 이게 정말 재밌었다. 세네개의 이미지가 번갈아 나오고, 그 장면들이 서로 조금씩 이어지는게 좋았다.


당신이 금요일을 사랑해서 금요일에 만났다
금요일이면 같이 커피를 마시고
골목을 걷고
그러나 이상하게도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없지
저번 금요일에는 그림을 그렸다 내가 빈방을 스케치하는 동안
왜 사람을 그리지 않는 거죠, 당신이 말했다... (중략)

죽음 뒤에도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까

숲 너머로 또 다른 숲이 보인다면
빛 한 점으로 어둠을 밝힐 수 있다면
가라앉고 가라앉은 곳에 평행 세계가 있다면...(중략)

가라앉은 채로 걷는 꿈
너는 계속 멀어진다
숲의 소실점을 향해
숲에서 숲으로
더 깊은 숲으로
너는 빛을 밀어내며 시야에서 사라진다……(후략)

-폭우 속에서 망가진 우산을 쥐고

가라앉은 채로 걷는 꿈, 평행세계에서 상대는 화자로부터 계속 멀어진다. 상대는 화자가 다가갈 수 없도록, 멀어질 수 없도록 두 발을 묶는다. 다가갈 수 없도록 화자로부터 멀어지지만, 화자 또한 상대에게 계속 다가가는 듯하다. 마음을 완전하게 주고 싶지만 그런 이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표현한 것 같다.


박동억의 작품 해설에서는 진심을 누설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아무리 말해도 마음을 다하지 못하며, 그래서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말처럼 그의 시에선 상대와의 마음을 이상화하고 싶은 마음, 머뭇거림을 자주 보았다.



이 다음에도 인상깊었던 구절을 몇 개 적어보려고 한다.

불안이란 건 내릴 수 없는 그네를 타는 거라고, 천장과 바닥 사이를 요동치는 거라고, 그렇게 이해했어 하루의 빛과 어둠이 내 몸을 관통하는 동안 나는 방 안에 틀어박혀 오르골 태엽만 감았어 누군가가 목을 조르고 복부에 쇠붙이를 들이대며 내게 죽으라고 말해 주길 기다렸지 하지만 그런 음악은 …

-우울 삽화-

유리조각이 내 몸을 관통하는 이미지에서, '빛과 어둠'이 내 몸을 관통한다고 언어를 확장한 부분이 좋았다. 어찌 보면 유리조각에서 빛과 어둠밖에 안 보이니까 저 말도 맞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불안을 저렇게 비유하는 것도 좋았다. 설명 다음에 바로 화자 자신이 불안에 떠는 모습이 나온다. 유리조각이 내 몸을 관통하는 고통을 느끼며, 천장과 바닥 사이를 요동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누군가 죽음을 말해주길 기다리는 장면은 정적이지만 공포스럽기도 하다.


예전에는 미래란 계획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는 미래의 나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슬픔으로부터
그 마음으로부터
나는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나면
내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내가 겨우 이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었다
나의 죄가 아니라 애초부터 계획된 것이었다고,
나의 죄가 아니다
나의 죄가 아니다......
계획된 슬픔도 진짜 슬픔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나에게 닿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는 슬픔
내가 원하지 않았던 그것
설령 그것을 내 것이라 여기더라도
나느
나는......(후략)

-다른 여름의 날들

개인의 합리화, 그리고 그 합리화가 실패하고 자신이 무너져 가는 걸

짧은 연으로 길다랗게 표현한 게 좋았다. 연의 길이가 짧아서 속도감이 느껴진달까.. 마지막 시라 그런지 시에서 전반적으로 긴장감이 많이 느껴졌다.


시가 전부 긴 편이라 완독하기에 쉽지 않았지만, 양안다 시인만의 문체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다음에는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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