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RT 하게 일하는 것
회식자리에서 F 차장을 처음 보았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눈이 마주쳤다. 흘깃 쳐다보더니 별 반응 없이 다른 팀원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키가 크고, 하얀 얼굴에 차가운 도시 남자의 전형이었는데, 말도 별로 없어 냉소적인 분위기와 어울렸다. 우리 회사에 이런 사람이?
지적인 첫인상에 걸맞게 실제로도 그는 아주 유능했다.
이 회사에 취직하고 처음으로, 어떻게 SMART 하게 일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람이었고,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순위에 변동이 없다.
그는 능력, 눈치, 센스를 겸비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E 팀장의 갈굼에도 조금은 벗어나 있었고, 어쩌다 한 번씩 혼나더라도 금세 신임을 회복하는, 우리 팀의 명실상부한 에이스였다.
전입 후 한동안은 F 차장과 교류가 없었다. 나는 E 팀장에게 매번 업무로 혼나는 사무실의 문제아라 여유가 없었고, F 차장과는 사무실에서 자리도 멀고, 업무분장도 관련이 없었다. 잦은 회식과 업무일지표 회의로 얼굴을 부딪혔을 때는, 좀 차가운 사람이구나 판단했다. 그만큼 평소에는 표정이 없었다.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도 드물었고, 다른 차장들에 비해 직원들에게 지나치게 깍듯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E 팀장에게, 그리고 지금까지의 짧은 사회생활 경험으로 비춰, 오히려 깔끔해서 나는 마음이 편했다.
몇 달 뒤, E 팀장이 직원들과 1:1 면담을 시작했다. 팀 내 결원이 생겨, 업무 조율이 필요했는데, 새로운 업무를 배워보지 않겠냐는 거였다. 규정과 지침을 정독하면서 나는 일 다운 일을 하고 있다는 성취감에 고취되어 있었고, 혼나고 있지만 일을 제대로 배우는 과정이라 여겼다.
기왕이면 젊을 때 여러 업무를 알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퇴직할 때까지 다닐 회사이니까. 그래서 부족하지만 시도해 보겠다고 작은 소리를 쳤다. 지금도 후회는 하지 않지만, 다른 직원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잘 빠져나갔으니, 내가 아직 신참내기라 미련하긴 했다.
새로운 업무의 담당 차장이 F 차장이었는데, 나는 내심 기대되었다. 그의 업무 스타일은 어떨까. 어떻게 지시를 내리고 보완해 줄 것인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에게서 나의 이상향의 상사 모습을 보았다. F 차장에게 중간보고를 하는데, 그는 내 보고를 들으며 가져온 자료에 보고 할 것과 쳐낼 것을 가려주었다. 그러니까, 보고에도 선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는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졌다. 어떤 부분은 “굳이” 팀장이 알 필요가 없는 사소한 내용이었고, 일일이 설명하다가 괜히 샛길로 빠질 수 있었다. 구구절절 길다고 좋은 보고는 아니니까.
사무실에서 업무를 하자면 정말 다양한 보고서를 접하게 되는데, 그는 보고서도 정말 잘 썼다. 우연히 그의 모니터를 봤는데, 텅 빈 화면을 띄워 두고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기존에 썼던 보고서 틀에 내용을 덧붙이는 등 수정하는 방식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그는 백지에서부터 시작했다.
연유를 물어보니, 그 만의 보고서 잘 쓰는 노하우였다. 좋은 보고서도 많이 읽어야 하지만, 계속 써 버릇해야 본인 것이 된다고.
그의 보고서를 읽자면, 문구 하나 단어 하나 허투루 쓰지 않았다. 한 장을 아주 알차게 썼는데, 더도 덜어낼 문구도 내 눈에는 없어 보였다.
E 팀장은 최종보고 전 중간보고를 빠른 시일 안에 원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보고는 정확하기보다는 신속해야 한다고 지시하면서, 큰 방향을 수정하고 사소한 부분도 꼼꼼히 살펴보는, 말과는 행동이 다른 사람이라, 차장들은 허겁지겁 보고서를 작성하기 바쁘다.
그래도 F 차장은, 으레 그래왔듯이 처음부터, 텅 빈 화면에서 시작했고, 그럼에도 중간보고와 최종보고까지 신속했다. 처장보고가 있을 때 E 팀장은 아예 F 차장 뒤에서 문구 수정을 지시했는데, F 차장이 부담스럽겠다 생각하면서도, 그만큼 실력을 인정받기 때문이기에 부러웠다.
그래서 나는 F 차장에게 보고 전에 종이에 수기로 보고 내용을 작성해서 F 차장에게 보여주었다. 보고서는 주로 차장이 작성하고, 실행은 직원이 담당하는데, F 차장의 조언이 듣고 싶었다. 그는 자상하게 수정해 주었지만, 그의 과외는 몇 번을 넘어가지 못했다.
내가 F 차장과 친밀해진 것에 E 팀장이 불쾌해 하기 시작했고, 눈치 빠른 F 차장이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E 팀장에게 보고 전에 사내 메신저로 F 차장에게 내용 설명을 했고, F 차장 역시 메신저로 지시했다.
그렇게 1차 보고가 끝난 후, 내가 F 차장 자리로 가서 아주 간략하게 보고 시늉을 하는 2차 보고가 이어졌다.
우리의 보고는 아주 단조로웠고 건조했으며, 삭막해 보였다. 그리고 사무실 뒤편에서 E 팀장은 우리의 보고를 다 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