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한 기억이 되어버리다
참 신기한 일이다. 담당 차장이 바뀌었을 뿐인데, 나는 순식간에 일을 잘하는 직원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일일업무일지표 회의에서도 나는 치켜세우는 쪽이 되어 있었고, 가끔은 다른 차장과 나를 비교하기도 했다. 듣기 민망할 정도였는데, 나를 칭찬하면서도 이를 이용해 다른 차장의 마음을 망가트리려는 E 팀장의 의도가 눈에 뻔히 보였다.
어찌 되었건, 혼나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했는데, 업무에 한해서는 F 차장의 효과를 탄탄히 보았다. 보고 가기 전 F 차장에게 걸러지는 부분이 정말 크게 작용했다. 자연스레 내 보고 스킬도 향상되었고.
나는 여러모로 F 차장을 의지했다. 일단, E 팀장에게 혼나지 않아 그에게 큰 은혜를 입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업무로 엮이고 나서 보니, F 차장은 내 예상보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무미건조한 사람이 거니 했는데, 대화를 자주 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다 보니 의외로 유쾌하고 소탈스러운 모습도 보였다. 팀에서 그는 젊은 차장이었는데, 직원들보다 고참 차장들과 잘 지냈다. 차장들에게는 오히려 톡톡 쏘는 발언을 스스럼없이 던지며 분위기 전환도 했고,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능글맞은 그를 선배 차장들은 이뻐했다.
정치적일 것 같은 사람이 무던하고 소박하니, F 차장을 대하는 내 마음도 편해졌다. 회식자리에서는 오히려 내가 F 차장에게 까불까불했고, 먼저 한 발자국 다가가니 그도 사무실에서처럼 딱딱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게 문제였다.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해외지사였다.
한 번 마음의 문을 연 F 차장은 나를 아주 친밀하게 대했다. 그렇다고 스킨십이 있다거나 성희롱 발언이 있거나 하지 않았다. E 팀장 같은 일은 전혀 없었다. 친밀 한 표현도 저급하지 않고 고상했는데, 은연중에 나만 알도록 다정스레 말을 한다거나 자연스럽게 직원들 앞에 내 역성을 들어주었다. 담당 직원을 챙기는 차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하지만 나는 위화감이 들었다. 하도 당해서(?) 이제야 그런 촉이 발동한 걸까. 나의 기우기를 바라며 지나가길 바랐다. 좀 멀어져야 하나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업무도, 자리도, 회식자리도 나와 너무 가까웠다.
어느 보통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식을 하고, 잔뜩 취하고, E 팀장의 숙소 앞에서 인사를 한 후 숙소로 가는데, 술이 거하게 된 F 차장이 농담처럼 지나가듯 이야기했다. 땡땡씨를 좋아한다고.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무슨 소리지? 술 취한 김에 던지는 농담이지 않을까? 그러기엔 집히는 구석이 하나 둘 떠올랐다. 그 답지 않게 초조해하거나, 은연중에 느껴지던 기시감. 그는 초등학생 마냥, 슬쩍 그렇게 감정을 던지고 가버렸다. 남아있는 나는 당황하다 못해 멍해졌다. 그는 당연 유부남이었고, 한 가족의 가장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 그는 E 팀장과는 다르게 나를 함부로 권력으로 누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 와중에 이런 계산을 하고 있는 나의 처지도 불쌍해졌다.
그리고 주말이 되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너무 고민이 되어 슬쩍 화두를 던져보았다. 그랬더니 웬걸! 그 친구도 나와 같은 상황을 견디고 있었다. 같은 팀 내 과장이었는데, 작은 선물을 주고, 챙겨주는 정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고민이라고 했다. 물론 그 과장도 유부남이었다.
우리는 개탄스러웠다. 대부분 남자들이 이런 건지, 해외에 나와있는 회사 직원의 특징인 건지, 그게 아니면 우리 둘의 행동 때문인 건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와 나는 호감형이긴커녕 되려 딱딱하게, 애살있게 일만 하는 직원이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은 되지 않았지만, 결과가 잘못인 건 명확했기에, 친구와의 대화에서 생각의 정리가 끝난 나는, F 차장과 둘만 대화할 수 있는 타이밍을 기다렸다. 사무실에서는 보고 듣는 귀가 많았고, 사내 메신저로 이야기하면 제대로 전달될 수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따로 커피를 마시자고 하기도 곤란했다.
그리고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잦은 팀 회식은 하루 걸러 이뤄졌으니, 나는 회식 이후를 노렸다.
E 팀장에게 평소처럼 모두가 인사를 한 후, 돌아가는 길에 F 차장에게 말했다. “차장님의 감정은 차장님께서 해결하시라고. 혼자만 알고 정리를 했어야 했고, 차장님은 나에게 감정의 배설을 한 거라고.”
그는 끄덕거리며 사라졌다.
맞다. 그는 나에게 “감정의 배설”을 한 것이다.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그의 감정은 그에게서 끝냈어야 한다.
나는, 그래도, 나를 인간으로 대해주는 F 차장을 만나 인간이 할 수 있는 대화로 그를 끊어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그건 잠깐 타오르는 섬광 같은 거였을 거다. 일도 많고 갈굼도 많은 이 험난한 해외 생활에서, 가족과 친구와도 떨어진 채 일과 술의 수레바퀴에서 길을 잃고 있는 거다. 각자의 방향으로.
애정결핍이 많았던 E 팀장은 직원에게 집착을 하고, 건조한 삶에 익숙해진 F 차장은 젊은 직원의 친밀한 다가옴이 반가웠던 거다. 매번 갈굼 당하기에 지친 나는, 술로 잊어보고자 했고, 며칠만 마시지 않아도 술이 당겼다. 그렇게 술 취한 사람들을 우스워했는데, 내가 그 꼴이 되어버렸다.
이곳은, 그렇게 다들 수렁으로, 골짜기로, 어둠으로 걸어 들어간다. 끝을 모르고.
그리고, 언젠가 이곳을 탈출하면, 자연스레 잊을 것이다. 좋았던 기억만 문득 떠올리겠지. 그 막연한 감정들은 어딘가에 묻어 둔 채.
내가 F 차장에게 실망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내가 바래 마지않던, 멋있는 상사의 모습을 보았고, 실제로도 그는 이상적이니까. 일도, 사람 자체도 참 듬직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사람인지라, 흔들렸나 보다.
가끔씩 내가 이런 일이 있었어하고 동생에게 말하면, 그 아이는 나에게 말했다. 윤리의식이 좀 부족한 거 같다고. 그럼 나는, 도덕 시험 볼 때 책을 외우기만 했지, 하고 싱겁게 웃었다.
나는 예전부터 상대방의 심리가 궁금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별거 아닌 제스처도, 말버릇도 유심히 관찰하곤 했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생각보다 많구나 싶었다. 은연중에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그러다가, 오히려 속마음이 반대인 경우도 발견하기도 했고.
어찌 되었건 나는 상대방을 파악하려,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는 경향이 종종, 아니 많이 있다. 문제는 가끔 그 사람의 입장에 과하게 이입을 한다는 거다. 그래서 상대방이 보기에 내가 다 이해해 주는 것처럼 보이니까, 상대방이 선을 넘는다.
어찌 보면 내가 유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또 선을 넘으면 바로잡아 버린다. 그런데도, 또 끈을 놓지는 않는다.
나쁜 사람이라고 상대방을 인식하고 싶지 않은,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만의 방어책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또 나름 이해가 되니까. 그렇게 하나둘씩 허용하다 보면, 상대방의 행동을 모호하게 만드는, 결국엔 내가 이중적인 사람이 되는 거다.
아직도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무엇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F 차장도 씁쓸한 기억이 먼저 떠오르는 상사가 되어버렸다. 사실 F 차장을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하는 마음이 더 가깝다. 존경스럽고, 대단하고, 아주 잠깐 삐끗했다 믿고 싶어 진다. 다들 실수는 하고 사니까.
F 차장과의 끝은 아주 깔끔했다. 그는 감정을 잘 갈무리한 듯했고, 나 역시 평소처럼 대했다. 없던 일 마냥 흘러갔고, 일은 일대로, 회식은 회식대로, 지나갔다.
몇 년이 지난 후, F 차장을 만났다. 회사에서 그를 다시 만났고 조금은 어색했지만 금세 예전처럼 대화했다. 알고 보니, 건너 아는 직원이 겹쳤다. 참 작기도 한 회사였다. 근황을 주고받고, 웃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가 팀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이끄는 팀은 어떨까. 합리적이고, 융통성 있고, 딱딱하지만 챙겨주는 팀이지 않을까. 그 팀의 막내 직원은 행복하겠지. 물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당해본 사람이 어떻게 괴롭힐지 안다는 속설처럼 그도 달라질 수 있겠지만, 내 기억 속에 F 차장은 그래도, 참 많이 사랑스럽다.
한때는 나의 이상향의 상사였던 F 차장, 승승장구하시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