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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너리 Sep 26. 2023

5-6. E 팀장_그때의 나도 맞고, 지금의 나도 맞다

나는 아직 다 괜찮지 않다 

결전의 날이었다. 나는 보고를 준비하듯 몇 번이고 할 말을 되뇌었다.

그가 회의실로 부르기 전, 나는 자발적으로 E 팀장의 사무실 자리로 가서 드릴 말씀이 있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목소리도 덤덤했고, 다른 팀원들이 들릴 수 있게 조금 큰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오래 생각해 왔다고. 늘 제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셨고, 노력했지만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니 어제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다른 팀으로 가고 싶다고. 많이 생각하고 드리는 말씀이라고.


처음으로 그의 놀람을 보았다. “브루투스, 너마저?” 같이. 몇 년을 시키는 대로 하던 직원이 갑자기 하극상을 일으키니.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일단 가보라고 했다. 떨릴 줄 알았는데 웬걸 마음이 후련했다. 그리고 덤덤했다. 내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된 까닭일까. 

그래, 이러면 되는걸, 궁지에 몰리고 몰려서야 내가 소중한 걸 아는구나. 

 

그리고 며칠 후, E 팀장이 나를 자리로 불렀다. 팀 내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동을 시켜 줄 수가 없다고. 아주 궁색한 변명이었다. 

그때부터였다. E 팀장의 스킨십이 줄었고, 나에게 집착하던 모습도 쉽사리 드러나지 않았다.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걸,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알아차린 걸까. 결재도 시원시원했다. 그래도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고 그가 국내로 복귀했다. 

 

새로 바뀐 팀장은, 건건이 수기 결재가 번거롭다며 한 장으로 만들기를 차장에게 지시했고, 그 복잡하던 일련의 과정들이 몇 분 만에 끝났다. 허무했다. 하루에 팀장과 대화한 적도 손에 꼽고, 내게 몰려 있던 업무분장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였다. 그렇게 한 달을 일하니 국내 복귀 신청을 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 당시에는 E 팀장의 거취가 정해지지 않았고, 나는 이 지긋지긋한 사무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복귀 희망서를 제출했는데, 진정한 월급루팡이 될 기회를 잃은 셈이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었다.


상사몽을 쓰기 시작하고 한 명, 한 명 상사를 회고하며 예전의 나 자신이 떠올랐고,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회가 지날수록, 아니 E 팀장의 차례가 될수록 나는 조급 해졌다. 끝판왕을 두고 다른 상사 이야기를 쓰고 있다니. 진짜는 따로 있는데 이런 잔챙이에게 시간을 허비하기 아까웠다. 


하지만 사건이, 사람이, 시간이, 내 경험이 모여 그 당시 내 행동을 이뤘기에 서서히 시간순으로 작성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E 팀장의 순서가 되었다. 그런데, 숨이 턱 막혀왔다. 내가 20대로, 그때의 나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이어졌다. 지금의 내가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의 나로. 


그 기억에서 벗어나려면 이 글을 빨리 써야 했다. 쓰고 한 단계를 건너야 했다. 다 쏟아내고 내 마음을 비우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쓰려고 하니 쓸 수가 없었다. 막막했다.

 

과거완료인 줄 알았는데 현재진행형이었다. 

나는 며칠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잊은 게 아니라 선택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거였다. 기억을 더듬을수록 묵혀둔 사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 질척한 진흙탕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빠져나오려 할수록 더 수렁에 빠지는 그곳. 그 사람. 

 

나는 확신을 가지고 싶어서 이 글을 쓴 거였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환경에서, 내가 잘 못 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잠식당하지 않았다고. 나는 살아남았다고. 그리고, 나는 아직 다 괜찮지 않다고.

 

며칠을 미루다가 겨우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쓰기 시작하니, 그렇게 담담하고 무미건조할 수가 없다. 감정적이기보다는, 3자의 시선으로 그를 보았고, 내가 관찰했던 사건과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재료가 되었다. 나는 그 당시 상황을 파헤치기보다 묘사하고 싶었다. 

기억이 꼬리를 물고, 내가 깊숙이 묻어 두었던 파편까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차마 적지 못한 사건도 있다. 그건 나의, 혼자만의 부채감으로 남겨둘 문제다. 그것까지 건드리기에는 아직 용기가 없다. 

그리고,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객관적으로도 나는 피해자이고, 가해자는 확실히 있다는 것을.


그 당시의 나를 되짚어 보다 보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왜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싫다고 말 한마디를 안 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내린 결론은,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는 거다. 나는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버텨냈고, 지금은 최선을 다해 쏟아내고 비우려 한다. 

그때의 나도 맞고, 지금의 나도 맞다.

 

 

굳이 E 팀장의 편에서 이야기하자면, 팀장 승진 후 제대로 된 첫 부임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많은 차장들 사이에서 본인도 잘하고 싶었을 거다. 힘을 너무 준 거지. 무시당하지 않고, 보란 듯이 잘 해내고 싶었겠지. 그래서 강하게 밀어붙였는데, 강약 조절은 실패한 듯하다. 중고참 차장들도 힘들어하는데 이제 신입사원 티를 벗은 내가 그 매운맛을 감당하기에는 맷집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렇다고 일련의 사건들이 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명백히 잘못을 했으니까.

나는 가끔씩 조직도에서 그를 조회해 보았다. 지금은 어디에 있나. 또 누구를 목표로 괴롭히고 있을까. 그렇게 팀원들을 훑어보다 끝머리에 신입 여직원을 발견하면 씁쓸해졌다. 잘 이겨나가고 있을까. 국내니까 조금 덜 하려나. 

그리고 그는 그렇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에게서 잊혀 갔다. 그는 카톡을 자주 탈퇴하고 가입하는 사람이었는데, 몇 번은 새로운 친구로 업데이트 목록에 있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나도 어느새 그의 관심 병사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나 보다. 내가 탈출한 적은 없으니까.  

그리고 내가 복귀하고도 한참 후에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징계를 받았다는 것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구나, 여전하구나. 내가 생각한 수준의 징벌은 아쉽게도 아니었다. 해고를 당하지도, 강등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이제 승진할 수 없다. 그러니까 처장으로의 승진이 막힌 셈인데 E 팀장이 그렇게 염원하던 높은 자리의 꿈은 사라진 것이다. 내가 바랬던, 사회적 성공의 길은 막혔지만, 그래도 그는 아직도 팀장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가 퇴직하기 전이라면, 또 그를 회사에서 만날 수 있다.

 

나는 오랜 기간 동안 혼나지 않으려, 눈치를 보고 그를 관찰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 그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애잔했다. 

그는,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자세히”, 그리고 시간과 인내를 가지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다른 어떤 상사보다도 더 많이 노력해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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