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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elle Nov 27. 2021

시대를 초월해 까발려진, 우리네 두려움과 속셈들

작가들이 사랑하는 박완서 단편집

작가들이 사랑하는 박완서 명단편 - [이별의 김포공항], [꽃잎 속의 가시], [닮은 방들], [그 남자네 집], 도둑맞은 가난], [카메라와 워커], [아저씨의 훈장] (문학동네)

박완서


각자 다른 작품들을 어떻게 한데 묶어 감상평을 남기겠냐만은, 그래도 감히 시도해보자면 이 작품들은 우리나라의 전후의 시대상, 가난,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머릿속 이해타산적이고도 진실된 감정들을 꿰뚫어 본 故박완서 작가님의 가장 훌륭한 작품들의 모음이라고 해야겠다. 그저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그린 것만 같이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들 저변에는 우리가 매일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 갈등, 그리고 남들에게 숨기고 싶은 수지타산이 녹아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하면 박완서 선생님께 실례일까, 나는 그저 멋모르고 경의에 차서 하는 발언임에도 박완서 작가님의 이름에 누가 될까 조심스럽다.


[이별의 김포공항]은 뿌리를 이야기한다.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그 뿌리를 거둬 이 땅을 벗어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 지긋지긋한 나라, 아니 정확히는 모두가 발버둥 치고 있는 가난이라는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 미국에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은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혀 비행기 표를 끊고 난 뒤, 노파는 주변 이들보다 우위에 서서 남들을 안쓰럽게 내려다본다. 하지만 이 나라를 벗어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 현실, 오히려 비행기가 뜨는 그 순간 모국과 물리적으로 연결되어있는 혈관이 툭 끊기는 것처럼 충격파가 진하게 전해져 온다. 이 단편을 읽으며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이 생각났다. 자신의 땅과의 영원한 단절, 그 이후 오롯이 외국어로만 살아가야 하는 이의 글은 이 노파와 같이 땅에서 파헤쳐지고 낯선 곳에 내던져진 이후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게 아닌가 싶다.

 

“마침내 기체가 이륙하는 것을 노파는 심한 충격과 함께 의식한다. 그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물리적 충격이 아니라 노파 하나만의 것인 아무도 헤아릴 수 없는 크나큰 충격이다. 몇백 년쯤 묵은 고목이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몽땅 뽑히는 일이 있다면 그때 받는 고목이 충격이 바로 이러하리라.”


[닮은 방들]은 급격하게 발전하던 한국 사회에서 ‘성공’이라는 단어가 명확하게 한 가지만을 지칭하던 시절, 지겨울 정도로 소시민적이고 평범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같은 구조의 아파트, 비슷한 형태의 가족, 고만고만한 경제 규모에 식탁에 오르는 반찬마저 같은 그 권태에서 벗어나고자 주인공은 아무도 모르게 간음까지 저지른다. 하지만 결국 간음을 저지르는 남자 또한 남편과 같은 포마드 향, 담배에 찌든 냄새마저 닮아 이게 간음인지 분간할 수도 없다. “나는 내가 간음하고 있다는 느낌조차 가질 수 없다. 나는 내 남편에 안겨 있는 동안에도 간음하고 있는 것으로 공상을 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는데 정작 간음을 하면서도 그것조차 안된다. 죄의식도 쾌감도 없다.” 읽으면서 어찌나 우리 세대의 권태와 비슷한지, 시대를 초월하는 글에 놀랐다. 어떻게든 이 굴레, 이 권태를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며 더 나은 삶을 동경하며 매일을 버텨내는, ‘남과는 다름’을 열망하는 사람들.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단박에 무엇이 이 여자를 그토록 충만하게 빛나게 했던가를 알아차렸다. 이곳으로부터, 이곳의 무수한 닮은 방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는 가능성이 이 여자를 그렇게 놀랍게 변모시켰던 것이다.”


[그 남자네 집]은 오랜만에 읽었는데, 다시 읽는 그 감회는 처음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 속내, 우리네의 속내를 온전히 다 까발려져 버린 느낌. 어렵던 시절 임신에 대한 두려움은 플라토닉을 표방한다며 포장하고, 불타는 듯한 사랑을 하지만 결국은 이해타산적인 선택을 하게 되고야 마는, 잔뜩 몸을 웅크리는 겁쟁이 같은 우리네 모습. 그 사람이 같은 도시에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지만, 결국 암컷 새들이 수컷들이 지은 집을 보고 짝을 고르는 것처럼, 주인공도 그 순간 사랑에 빠진 수컷의 집이 충분히 맘에 들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의 집도 우리 집도 사방이 비 새고 금가 조만간 무너져 내릴 집이었다. 도저히 새끼를 깔 수 없는 만신창이의 집.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새끼를 위해 그런 집은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결국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겁쟁이들의 비겁한, 하지만 현실적인 논리인 것이다.  


“요샌 뭐든지,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돈 버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여봐란듯이 하는 세상이니까.”



이 책은 문학동네에서 진행하는 북클럽문학동네 내에서 제공되는 책입니다. 시중에는 각각 다른 단편들과 묶여 유통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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