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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노엘 Nov 02. 2017

내일은 눈이 펑펑 내렸으면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 페터 빅셀


 저자가 스위스의 한 주간지에 기고한 칼럼들을 모은 책이다. 바쁘게 살아야 하는 지금 이 시대에 저자는 멍하게 있기, 아무 일 안 하고 빈둥거리기, 그냥 숨쉬기, 존재하기를 강조한다. 아무 일 안 하고 서성이는,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한 치의 오차도 존재하지 않는 수학적인 삶보다 뜻하지 않은 우연으로 범벅된 삶을 살고 싶단다, 저자는. 


 "이제 어느 역에서 기차를 놓쳐야 할까.”
“비와 눈, 햇살과 안개는 과학적인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연히'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당신의 미래는 이미 망친 것도, 금빛으로 빛나는 것도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농부들이 따르는 날씨에 관한 격언이 일기예보보다 옳을 때도 있음을 깨닫는 기쁨은 무척이나 컸다. 농부들의 격언이 올해 맞지 않았더라도 다음 해에 다시 기회가 있었다. 나는 적어도 일기예보가 잘 맞지 않던 어린 시절을 보낸 게 기쁘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해도 눈을 기다리고, 날씨가 추워진다고 해도 따뜻하기를 기대할 수 있었으니까.” 


몇 년 전 겨울, 뉴욕에서 지하철을 탈 일이 있었다. 밤 10시, 11시가 넘은 늦은 시각이었다. 마지막 지하철은 몇 시에 있는지, 온다면 몇 분 후에 오는지 나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봤는데 안내판도 없고  information station도 없었다. 그나마 주위를 둘러보니 플랫폼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몇 명 있어서 아직 지하철이 끊긴 건 아니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도 없는 뉴욕 한복판에서 한밤중에 발이 묶이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사람에게 지하철이 언제 오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도 잘 모른단다. 지하철이 끊긴 거냐 다시 물었더니, 세상에, 그것도 모른단다. 


지하철이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이 마냥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한국에서는 스마트 폰이나 플랫폼 안내 전광판에서 다음 열차는 몇 분 후에 도착하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심지어 다다음 열차도 몇 분 후에 도착하는지까지 알 수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정보. 나는 이런 것에 익숙하다. 바로 몇 분 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스스로 정확하게 알고 있는 상황 속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삶에서도 그렇다. 인생이 내 예측대로 움직이길 바란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갖기를 원한다. 그래서 미래를 내 통제 아래 두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 중에서 최고, 최선의 답을 선택하길 스스로에게 강요한다. 연애든, 취업이든, 결혼이든, 이직이든, 그 무엇이든. 나의 모든 선택은 완벽해야 하고 예측 가능해야 하고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미련하다. 하루하루 실수는 계속 생기고, 내 예상과 어긋나는 일들은 언제든지 벌어진다.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꾸만 내 선택에 대해 후회하고 자책한다. 다른 선택을 하면 더 나았을까? 지금 이 길이 최선이었을까? 그때 A가 아닌 B를 선택했어야 했는데.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자꾸 남는다. 내일 날씨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한 기상청처럼 자신감을 잃고 위축된다. 한심하고 불쌍한 완벽주의자. 


내려놓아야겠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된 극본대로만 살고 싶어 하는 시시한 마음을. 나는 잘 쓰인 대본대로 움직여야 하는 의지 없는 배우가 아니니까. 내 인생의 무대는 고작 몇 평에 불과한 연극 무대 위가 아니니까. 나는,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셀 수 없이 많은 갈림길 속에서 마음껏 내 인생의 빈 페이지를 채워갈 수 있는, 내 인생의 유일한 작가니까. 쉬고 싶으면 쉬고, 다른 길로 가고 싶으면 언제든 방향을 바꿔야지. 한 우물 파기가 지겨우면 언제든 변덕을 부려야지. 오늘처럼 화창한 날이면 잠이 올 때까지 멍하게 창문을 바라볼 테다. 


이제, 일기예보가 틀리기를 기도하는 낭만을 기대한다. 오늘의 예측이 완벽히 비껴나가는 유머를 즐길 수 있는 여유. 기차역에서 기차를 놓칠 일이 없음을 아쉬워할 수 있기를. 이런 넉넉함으로 인생을 마주하길. 내가 모르는 내일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야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과 돌부리를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바라봐야지. 내가 짜 놓은 틀에서 완벽히 벗어나는 순간의 짜릿함. 


내일은 눈이 펑펑 내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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