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 버지니아 울프
가장 먼저, 돈이 필요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연간 500파운드 정도의 고정적인 수입이 사람의 기질을 엄청나게 변화시킨다고 말했다.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또 누구에게도 아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정적인 수입은 남녀를 불문하고 어떤 지적인, 예술적인, 그러나 비생산적인(돈을 버는 것을 생산이라고 생각한다면)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꼭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다. 돈이 있어야, 누구든지 한 주제에 관해 여유를 가지고 깊게 고민할 수 있고, 고민의 결과를 타인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고민의 시간들 속에서 굶어 죽지 않을 수 있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지요.
지적 자유가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다는 그녀의 말은 꽤나 충격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주장'은 '진리'다. 구구절절 더 설명을 부연할 필요도 없는, 말 그대로의 진! 리!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자기만의 방이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홀로 고요히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무슨 짓을 하든 어느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은밀한 장소. 이것 역시 남자든 여자든 누군가가 픽션을 쓰기 위해 꼭 갖춰야 할 요소다. 여기서 울프가 말하는 자기만의 방이란 물리적인 공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이 함축된 '방'이다.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어우러져야 진정한 방이 완성된다. 우리가 18세기 '여성'의 소설이나 희곡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그 시대 여성들이 독자적인 방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슬프게도 울프가 살았던 20세기 초반에도 여성들은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했고 21세기인 지금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다. 결혼 / 출산 / 육아로 인한 여성의 경력단절, 육아휴직 사용으로 인한 비공식적 부당대우, 쉽게 깨지지 않는 유리 천장 등 '방'을 갖기 위한 여성들의 노력은 아직도 눈물겨운 '투쟁'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타인의 신뢰, 기대감, 지지다. 여성의 경우에는 신뢰나 지지는커녕, 핍박을 받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키츠와 프롤베르와 그 밖의 천재적인 남성들이 몹시 견디기 힘들어했던 세상의 무관심이 그녀에게는 무관심 정도가 아니라 적대감이었습니다.
자신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핍박을 받고서도 온전히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냐고 울프는 우리에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지옥일 것이다. 사르트르도 '지옥은 타인'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무관심을 넘어 세상으로부터 적대적인 손가락질만을 받는다면, 어떤 사람이든지 그는 자신감을 잃고 위축돼 쪼그라질 것이다. 그 적대감은 우리 사회에서 유독 여성을 심하게 옥죈다. 학교나 집에서 아직도 무의식적으로 여자 아이에 대해서는 순종적인 태도를 강요한다. 성인이 된 후에는 더욱 강화된 적대감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에서 벗어나는 여성을 잔인하게 난도질한다. 아기를 낳은 후에도 일 욕심을 내는 엄마에게는 손쉽게 죄책감을 씌워주고, 며느리 도리를 하지 않는 아내에게는 뻔뻔한 독설을 퍼붓는 게 우리의 실정이다. 한 사람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따뜻한 지지가 얼마나 위대한 에너지를 만드는지를 생각해 보면, 암담한 현실이다.
그러나 울프는 좌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변화를 위한 비판도 했다. 그녀는, 오늘날 여성은 새롭고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할 기회를 이전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노예처럼 남성을 모방하면서 여성이 그 기회를 낭비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에 따르면
우리는 더 가난해야 한다.
가난이란, 살아가기에 충분한 돈이라고 그녀는 정의했다. 어느 누구에 대해서나 독립적을 수 있고 몸과 마음을 온전히 발달시키는데 필요한 건강과 여유, 지식, 기타의 것들을 소량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의 돈. 그러나 이 이상은 안 된단다. 1 페니라도 더 벌어서는 안 된다고 그녀는 단호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순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순결이란 직업을 통해 살아갈 만큼 충분히 벌었을 때 돈을 위해서 두뇌를 파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뜻이란다. 즉, 충분한 돈을 번 후에는 직업에 종사하는 것을 그만두거나 오로지 연구와 실험을 위해 종사해야 한다. 배지나 훈장, 학위 등을 신랄하게 조롱하면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충성심으로부터 탈피하면서.
나는, 충분히 가난한가.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고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강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을 픽션에만 한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니까요.
모두가 잠든 밤. 무거운 눈을 자꾸 부릅뜨고, 왠지 모르게 아프기만 한 어깨를 두들겨 가며 글을 쓰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이 한 바닥 글만큼, 조금 가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