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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연두 Sep 18. 2024

호수 위의 백조

끝이 안 보이는 터널 5

겨울은 입사 초부터 줄곧 화장품 브랜드팀에서 일하고 있었다. 처음에 들어온 건 마케팅팀이었지만, 몇 번의 조직개편을 거치면서 이름만 브랜드팀으로 바뀌었다. 흔히들 마케팅이라고 하면 tv나 온라인에 나갈 광고를 찍고, 신제품 런칭행사를 하며 홍보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 겨울의 팀은 광고 홍보보다는 제품 포트폴리오 관리, 신제품 기획 및 런칭, 프로모션, 재고관리 등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브랜드에 관한 모든 것을 책임지는 일, 그래서 바뀐 브랜드팀이라는 이름이 실제 업무에는 더 어울렸다.


브랜드팀은 매월 영업팀과 3개월치 프로모션 계획을 공유하는 회의를 했다. 겨울이 만드는 회의자료도 이 영업회의에 공유할 자료였다. 겨울이 담당하는 판매채널은 A유통과 직영점 채널이었다. 마트에 입점해 있는 직영점은 한때 브랜드 매출의 50퍼센트 이상을 담당했을 정도로 중요한 채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A유통에 밀려 30퍼센트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사 내에서는 중요한 채널이었다. 회사에서 직접 운영하는 직영점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반면, A유통은 모든 업계 관계자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채널로 여겨졌다. 특히 최근 이삼 년 사이에 2배 이상 성장해서 매장 수도 이제 2천 개 가까이 되었다. 흔히 매장이 천 개가 있으면 웬만한 소도시까지 다 커버할 수 있다고들 한다. 2천 개면 번화가에서 걸어 다니면서 방금 봤는데 또 나오는 수준. 발에 차이게 많은 A 유통은 이제 전체 화장품 판매 채널 중에서 가장 크다. 게다가 고객층이 20대 중심의 젊은 층이라 전략적으로도 의미가 큰 판매채널이었다. 하지만 모든 걸 컨트롤할 수 있는 직영점과는 달리 하나부터 열까지 A 유통 담당자를 통해 확인받고 진행해야 하는 채널이라 실무자로서는 좀 까다로운 면이 있었다. 어느새 팀장 다음으로 제일 연차가 많아진 겨울은 젤 중요한 두 개의 채널을 담당하고 있었다.


영업회의는 다음 주. 속도를 내서 영업회의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에 둘째를 데리러 가려면 야근은 불가능하다. 업무 시간에 소화 못 한 일은 편의점 음식으로 대충 때우며 점심시간에 하던지, 아이들 재워놓고 노트북을 켜 마무리짓던지 어쨌든 해내야 한다. 3시부터는 또 팀회의가 있기 때문에 더 시간이 빠듯했다.


2시 반, 겨울은 다시 상자업체로 전화를 걸어서 재작업한 상자들이 공장으로 무사히 떠났는지 확인했다. 방금 상자들을 다 실어서 출발한단다. 다시 공장 반장님께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했다. 불량품 때문에 포장 못 한 물량 빼고 나머지 3만 개는 이제 거의 마무리되고 있단다. 재작업한 상자 오면 바로 이어서 하면 7-8시면 끝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들은 겨울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부디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3시부터 하는 팀회의 주제는 올 하반기와 내년 신제품 진행 과정 공유하고 점검이었다. 다다음달 초인 5월에 사업부장님께 하반기와 내년 계획을 보고하기 위해 연구소와 제품 기획팀과 회의는 2주 후에 잡혔다. 그전에 팀 의견을 정리하려면 몇 번의 내부 미팅이 필요했다.


회의 직전에 한 번 더 상자업체와 공장에 연락을 한다. 재작업한 상자가 문제없이 들어왔는지 다른 문제는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혹시라도 상자에 여전히 문제가 있다면 할 일이 많았다. 바로 상자 업체에 재생산 가능한지 문의한 뒤 입고날짜 받고 공장에는 2만 개 포장은 재생산된 상자 받을 때까지 미뤄달라고 부탁하고, 영업팀에는 전화해서 8만 개 먼저 입고시키고 2만 개는 작업 마치는 데로 보내겠다고 얘기해야 했다. 그러면 영업팀은 A 유통에 전화해서 또 사정을 해야 할 것이다. 상자가 불량인 것은 상자업체의 잘못이지만, 일정이 급한 일에는 잘잘못을 따져봐야 큰 의미는 없다. 중요한 건 어쨌든 일정에 차질 없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는 것이었다. 하나의 문제는 나비효과처럼 관련된 많은 사람의 업무에 영향을 미친다. 상자 업체 담당자만이 아니라, 공장 반장님에게 영업팀 담당자에게 A유통 담당자에게.. 그걸 최대한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빠르고 부드럽게 의사소통하는 게 겨울의 업무였다.


한편으로는 기갈나는 광고를 만들어 신제품을 띄우고 소셜미디어나 미디어에서 회자되는 마케팅 활동을 해야 윗분들의 눈에 들 텐데, 이런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면 겨울은 가끔 자신이 호수 위의 백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일이 없이 평온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만도 힘이 든다. 위에서는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생각해 보니 자신에게 백조는 너무 과분한 칭호였다. 버둥거리면서 그 자리를 유지하는 건 백조와 같지만 자신은 그렇게 우아하지 않았다. 그냥 회사라는 거대한 기계에 있는 한 톱니바퀴였고, 개미사회에 있는 수많은 일개미 중 하나였다.


다행히도 재작업된 상자는 공장에 무사히 도착했고, 더 이상 스스로 열리지 않았다. 포장도 오늘 저녁이면 완료될 것이고 품질검사에 문제가 없다면, 모레 무사히 출하될 것이다. 이제는 팀회의에 들어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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