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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Oct 11. 2024

ㅇㅇㅇ를 설치할 수 없다는 독일 원룸

독일 학생들은 어디서 살까


독일 학생들은 어디서 살까


한국에서 성인이 되면서 부모님 집을 떠난 이후로 이사는 늘 내 뒤를 따라다니는 단어였다. 때로는 오르는

월세 때문에, 때로는 직장을 따라서, 때로는 해외로 떠나느라, 나는 틈만 나면 이사를 했다. 특히 이사는, 또 집을 본다는 건, 해외에 나가면 무조건 거치게 되는 필수 코스라고 볼 수 있다. 처음부터 좋은 집에 살게 되면 베스트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외국인으로서 해외에서 내게 딱 맞는 집을 찾기란 더더욱 쉽지 않다.



(c) 2024 noi



애초에 집을 구하는 경쟁부터가 치열한 대도시에서는 더욱 그렇다. 도시에 따라서 월세는 천차만별이고,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순위가 바뀌지만, 함부르크는 늘 월세가 높기로 상위권에 드는 도시 중 하나다.


Statista의 조사에 의하면 제곱미터당 월세 비용이 가장 높은 독일 도시는 뮌헨이다.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슈투트가르트, 프라이부르크에 이어 함부르크와 포츠담이 공동 6위를 차지했다(2024년 2분기 기준).


독일 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거주 옵션은 주로 이렇다.


- 학교 기숙사: 저렴한 것이 장점. 하지만 공급이 부족해서 자리 얻기가 어렵다. 주말마다 파티로 시끄러울 가능성이 높아서 파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좋지만, 반대의 경우 피곤할 수 있다.


- 사설 기숙사: 시설이 깔끔하고 빈 방이 제법 자주 눈에 띈다. 기숙사마다 다르지만 가격이 제법 비싼 편. 하지만 그만큼 풀옵션에 새집 같은 느낌으로 꾸며두는 것 같다. 그래도 금전적 여유가 있고 가구나 이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이 단기로 살다 가고 싶다면 나쁘지 않은 듯. 여기도 기숙사라 파티 가능성이 있다.


- WG: 한국말로 독일어 발음을 표현하자면 ‘베게’가 가장 비슷하다. 쉽게 말해 룸메와 사는 것이다. 독일 학생들의 가장 흔한 거주 형태이다. 집 크기에 따라 2인, 3인, 4인 등 다양한 형태로 거주한다. 친구와도 지내지만 아예 모르는 남, 혹은 친구의 친구와도 같이 살며, (인간 대 인간으로) 남녀가 같이 사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기숙사보다 크고 독립적인 공간, 집다운 집(?)에서 살면서도 월세과 관리비를 아낄 수 있다는 장점. (사실 대부분 학생이니 돈 아끼려고 WG로 산다). 괜찮은 룸메를 만나면 살만한데, 이상한 룸메를 만나면 시급한 탈출이 필요하기도 하다.


- Einzelzimmer(아인첼찜머)&Studio: 월세에 돈은 너무 많이 쓰고 싶지 않으면서도 혼자 살고 싶은 사람들이 찾는 게 여기다. 아인첼찜머와 스튜디오는 엄연히 다른 공간이지만 한국의 원룸 개념으로 자주 혼용되서 쓰이는 듯하다. 한국의 원룸 개념에 더 가까운 것이 스튜디오이다. 아인첼찜머는 침실 하나와 분리된 거실 공간이 있는 집을 말한다. 즉, 침실과 분리된 생활공간 사이에 벽이 있다는 게 차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벽 없는 스튜디오 타입의 집도 아인첼이라고 많이 부른다. 그러니 원룸을 찾는다면 이 두 가지 타입을 다 찾아보자.


- Wohnung(보눙): 4-5층 짜리 다가구주택 형식의 빌라에서 방 두 개 이상의 집에서 거주하는 형태로 일반 가정에게 가장 보편적인 형태로 보인다. 보통 WG가 이런 보눙에서 방을 나눠 월세를 나눠내는 방식이다. 혼자 살면 당연히 월세는 좀 더 비싸지만, 분리된 공간에서 쾌적하고 독립적으로 생활이 가능하다. 파트너나 가족과 살기에 가장 좋다. (보눙 다음은 하우스가 있지만 학생들이 선호하는 거주 형태는 아니므로 패스.)



10월이면 새학기가 시작되는 독일, 집 찾는 사람이 많다 (c) 2024 noi




독일 원룸을 보러 가다


집은 꼭 당장 필요할 때가 닥쳐서 보는 것보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보는 게 좋은 것 같다. 금전적 여유와 시간적 여유가 둘 다 있다면 좋겠지만, 금전적 여유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나마 조절할 수 있는 게 시간적 여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일 집을 보는 건 한국 집 보는 거랑은 또 다르다. 집만 볼 게 아니라 주변 환경, 치안도 어느 정도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는데 한국에서 정보를 얻는 것보다 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사기도 있으니 더 조심해야 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지난 몇 년간 이사를 가야겠다는 마음, 혹은 조그만 의지조차 전혀 없었다. 지금 집이 마음에 꼭 다 들어서라기보다는 그럴만한 여력이 없었다. 살면서 너무 자주 이사를 해서 이사가 지긋지긋해져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딱 지난달부터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 조금씩 이사를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나 할까. 좋은 집이 보이면 한 번씩 보러 다녀보기로 정했다. 아마도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취업이 어디로 되느냐에 따라 졸업 후 이사를 해야 할 수도 있고, 나는 독일에 온 이후로 이 집에서만 살아서 다른 집은 제대로 보러 다닌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에 경험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동안 집을 보러 다녔다. 대부분 복사 붙여 넣기를 한 듯이 비슷한 구조의 원룸이 대부분인 한국에 비하면 독일은 그 반대에 가깝다. 오래된 건물들을 전부터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아서 평수가 비슷하다고 해도 내부 구조나 집상태가 아주 다양하다. 그래서 고작 원룸 두 군데를 봤을 뿐인데도 두 집이 전혀 달랐다.


첫 번째 원룸


첫 번째 집은 내부가 참 괜찮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신발장과 작은 옷장 정도를 놓을 수 있는 작은 현관 같은 공간이 있었다. 왼쪽에는 욕실이 있고 오른쪽은 메인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큰 침대와 작은 테이블, 책장 등 기본적인 가구를 다 넣고도 공간에는 제법 여유가 있었다.


욕실은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변기, 세면대, 샤워 부스가 차례대로 설치되어 있었다. 직사각형이라는 점만 빼면 크기 자체는 한국의 일반 화장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욕실 안쪽 벽 높은 곳에 작은 창문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창문이 열리지는 않는다고 했다. 기왕 창문을 설치해 놓고 왜 열 수는 없게 해 놓은 건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욕실은 좁으니까 습도는 작은 제습기로도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부엌은 아주 작았다. 하지만 대학 친구집에 놀러 갔다가 더 작은 부엌도 본 적이 있어서 그에 비하면 있을 것도 다 있고 창문도 아주 컸다. 그래도 나름 독립적인 공간에 짜여있어서 방과 부엌 사이에 커튼 같은 것도 달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겨울이 제법 따뜻한 집이라는 점과 조용하고 탁 트인 발코니였다. 바닥 난방에 익숙한 한국 사람에게 독일의 히터식 난방은 적응이 꽤 필요한 변화다. 그리고 앞에 말한 것처럼 오래된 집이 많아서 단열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외풍이 들어 추운 집들이 많다. 그런데 단열이 잘 되어 있고 낮은 층에 있는 집들은 윗집에서 히터를 틀면 파이프를 통해 그 열기가 지나가면서 우리 집도 자연스럽게 같이 데워주는 구조의 집들이 종종 있다. 학교 친구 중 한 명이 그런 집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보러 간 집이 딱 그런 집이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굉장히 플러스가 되는 장점이었다.


발코니는 작지만 탁 트인 맞은편 풍경과 함께 아늑한 분위기가 들었다. 그리고 이 집을 보면서 알게 된 건데, 큰 도로변에 있는 건물이어도 집이 도로 반대쪽으로 나있으면 도로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고 아주 고즈넉한 분위기가 들었다. 이런 점이야 말로 한국식 원룸에서는 찾기 어려운 독일 원룸만의 독특함이 아닐까. 한국에서는 발코니가 있는 삶은 상상조차 안 하고 살았는데 독일에 오고 나서 발코니가 있는 집이 너무 좋다.


사진을 보고도 괜찮은 집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간 거였지만, 생각보다 더 괜찮았다. 상황이 따라준다면 바로 이사를 하고 싶을 정도로 괜찮았다. 문제는 일정과 교통편이었다. 집주인은 가장 빨리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을 원했는데, 그 일정이라는 게 빠르면 보름 뒤, 늦어도 한 달 뒤 입주였다. 그런데 보통 독일의 일반적인 임대차 계약은 살던 집에서 나가기 전에 3개월 전에 서면으로 알려야 한다. 만약 지금 내가 지내는 집이 바로 나가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에 두 달을 두 집 월세를 다 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한 달 정도는 감당할 수도 있겠지만, 두 달의 리스크는 좀 크게 느껴졌다.


교통편도 버스를 타고 조금은 들어가야 하는 지역이라는 점이 고민스러웠다. 이건 상대적인 부분인 게 지금 살고 있는 집이 교통편이 너무 좋다. 살다 보면 적응은 되겠지만, 무엇보다 졸업 후 취직하고 싶은 희망 직장까지의 통근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다.


이런 고민이 너무 길어졌던 걸까? 집을 보고 온 게 오전, 혹시나 상황이 어떤지 다시 연락드린 게 저녁이었는데 이미 집 계약할 사람이 정해졌다고 했다. 내가 반나절 정도 고민하는 동안 더 간절했던 내 다음 사람이 바로 계약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역시 좋은 집이라고 생각했던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많이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어떡하겠는가. 또 하나의 큰 배움을 얻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게다가 감사하게도 집을 내놓으신 분이 지인 분의 다른 집 정보를 알려주셔서 다음 집을 볼 기회를 얻었다.



두 번째 원룸


그렇게 다음 날 두 번째 집을 보러 갔다. 첫 번째 집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동네라 미리 동네 조사도 하고 이것저것 알아볼 게 더 많았는데 두 번째 집은 내가 평소에 자주 다니는 지역과 멀지 않아서 크게 알아볼 것도 없었다. 벌써 친근한 마음도 들었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발견한 장점은 큰 도로와 떨어져 있는 주택가 안쪽 집이라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으슥한 골목 느낌도 아니었다. 차 한 대 정도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고, 자동차만큼이나 자전거가 많이 주차되어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면 굳이 사람들이 지나다닐 것 같지 않은 그런 길이었다. 구불구불 굽어진 길을 따라 들어가는데 동네의 분위기가 제법 괜찮았다.


두 번째 집은 건물부터가 아주 오래된 건물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앤티크 한 스타일의 철제 난간이 붙어 있는 나무 계단이 그랬고, 특히 방 천장에 새겨진 조각이 그랬다. 예전에도 우연히 어떤 집에 방문했다가 비슷한 양식의 집을 본 적이 있었다. 왜 흔히 유럽에서 보는 건물이 새겨진 돌조각 같은 것들이 있지 않나. 그런 조각이 집 안, 그것도 방 안 천장에 우아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다. 평면도 아니고 입체식으로! 나는 그 점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 집이 가진 독특한 매력이라고 생각됐다.


이 집도 첫 번째 집처럼 문에서 방까지 현관 비슷한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현관문 맞은편에는 욕실이, 오른쪽에는 메인 공간인 방이 있었다. 이번에 방문한 두 번째 집도 큰 침대와 테이블 하나, 책상 두 개를 놓고도 제법 여유가 있었다. 부엌은 방구석에 작은 싱크대가 있고, 싱크대 바로 맞은편에 약간 높은 스탠드형 조리대를 설치해서 공간적으로 분리를 해두었다.


집은 크게 춥지는 않다고 했는데 물론 이건 개인차가 있기는 하므로 어느 정도 감안해서 들었다. 첫 번째 집만큼 따뜻한 집이라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이건 첫 번째 집이 특이한 경우고 이 집은 보통인 것 같았다.


또 하나 특이한 건 발코니를 옆집 사람과 공유한다는 것이었는데, 발코니로 넘어갈 때 창문을 넘어가야 한다는 게 신기했다. 그러니까 발코니가 반은 옆집 앞에, 또 나머지 절반은 이 집 창문 앞에 걸쳐져 있었다. 아마 원래 옆집과 이 집이 하나의 집이었는데 벽을 세워서 분리를 한 것 같다고 말해주셨다. 얼핏 옆집 발코니에 있는 작은 빨래 건조대에 걸린 빨래를 보니 여자분인 것 같았다.


특이하게도 가구는 집주인이 마련해 준 게 제법 있어서 원하지 않으면 빼준다고 해서 그 점도 마음에 들었다. 첫 번째 집은 가능하면 자신들이 사용하던 가구를 중고로 함께 구매해서 입주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오래된 건물임에도 방음이 잘 되고 주위가 조용하다는 점, 그리고 주위 환경 인프라가 너무 좋다는 것이었다. 도서관, 영화관, 카페, 맛집, 한인마트가 가까운 곳에 있고 지하철 역과는 거리가 좀 있지만 첫 번째 집보다는 가까웠다. 시내와 좀 더 가깝다는 점이나 치안이 굉장히 좋은 지역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첫 번째 집이나 지금 내가 사는 집이 치안이 안 좋은 건 아닌데, 이 동네가 좀 더 좋다는 느낌으로다가).


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세탁기를 설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일에는 집에 세탁기가 없는 집들이 많아 건물 내 공용 세탁실을 쓰거나 밖에 있는 코인 빨래방을 쓰는 사람들을 많이 보긴 했다. 나도 꽤 오랫동안 건물 공용 세탁실을 쓰면서 살았다. 공짜도 아니다. 그래도 바깥 빨래방보다는 저렴했다. 그런데 이게 몇 년 정도는 할만한데 더 길어질수록 힘들어져서 작년에 세탁기를 구매했다. 그러고 나서 삶의 퀄리티가 정말 많이 바뀌었다. 새삼 느끼는 세탁기의 소중함.


그런데 첫 번째 집은 작아도 세탁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두 번째 집에는 아예 세탁기가 없었다. 설치가 가능할지 말지도 구조 상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세입자 분이 집주인에게 세탁기 설치가 가능한지 물어봐 주셨는데, 다음 날 돌아온 답은 세탁기 관련 보험이 되어 있지 않아서 세탁기 설치는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만약 안된다고 하더라도 수도 공사를 해야 한다거나 하는 구조적인 문제일 줄 알았는데 보험 때문에 되지 않는다니, 의외의 답변이었다. 이 정도의 월세를 내면서 세탁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아쉽게도 거절 의사를 밝혔다.



명랑한 은둔자와 커피 타임 (c) 2024 noi


머릿속으로 해보는 이사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멀리 여행을 갔을 때 늘 그러듯이 이번에도 시간을 내어 그 도시를 돌아다녔다.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만약 내가 그곳으로 이사한다면 어디에서 살지 상상해 보고, 머릿속으로 여러 동네를 시험해 보고, 마치 새 신발을 살 때 그러는 것처럼, 나는 생각한다. 와, 이 길이 참 좋네….. 이 집 참 마음에 들게 생겼다….. 저 옥상 테라스 예쁘다….. 여기서 내가 살아도 좋을 것 같아…… 나는 샌프란시스코와 파리에 갔을 때도, 필라델피아와 시애틀과 캘리포니아 북해안에 갔을 때도 이런 식으로 머릿속으로 이사를 해보았다.
이런 상상에는 발견의 재미가 있다.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p. 298)



한 번도 새로운 도시에 갔을 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책을 읽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번에 집을 보러 다니면서 작가의 이 문장이 어떤 느낌으로 쓴 건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동네에서 사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새로운 동네를 모험하는 기분이 들었다.


첫 번째 집에서는 버스를 타고 다니는 내 모습이나 저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내 모습, 발코니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는 내 모습 등이 뭉글뭉글 떠올랐다. 집을 보고 나서는 집 근처를 걸으면서 마트는 어디에 있는지, 공원은 어디쯤 있는지,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유심히 보며 내 이웃이 되는 모습을 상상했다.


두 번째 집은 집도 좋았지만 특히 주위 환경이 만족스러웠다.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있어도 집에 가는 길이 멀지 않다거나, 내가 제일 자주 가는 카페 프랜차이즈가 집 근처에 있다는 점이나, 밤늦게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고 오는 일도 새로운 취미가 될 수 있겠고, 무엇보다 한인마트가 가까이 있다는 건 외국에 나와 사는 한국인에게 오아시스가 집 옆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내 경우에는 실제로 이사를 고려하면서 한 상상이라 더 실감이 났는지도 모른다. 비록 열심히 돌아본 두 집 모두 내 집이 될 인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간을 들여 집을 본 보람은 있었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누군가 더 간절히 그 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집이 잘 쓰일 테니까 좋은 일이다.


내가 과연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떠나게 될까…?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살 곳은 정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정해지는 것이라는 캐럴라인 냅의 이야기에 깊은 공감을 했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장소에 정착하는 것은 특정한 목표와 기준에 따라 인생의 특정한 시기에 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자신에게 알맞은 대학을 고르거나 직업을 선택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고 여긴다. 먼저 계획을 짜고, 어떤 장소를 고르고, 그다음에 신중한 고려를 거듭하여 집이나 배우자나 자녀 같은 영구적 정착의 장식물들을 제 주변에 배치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 과정이 훨씬 더 무계획적으로, 훨씬 더 우연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p.297)



내게 지금 함부르크가 그렇다. 이 집에서, 이 장소에서, 이렇게 오래 지낼 계획은 없었다. 그저 삶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다고 해야 하는 편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0’에 가까웠다가 갑자기 마음의 변화가 생긴 것에도 어떤 이성적으로 납득이 될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다른 집을 살펴보며, 그러니까 이 도시에서 편안히 지낼 만한 집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 체험해 보면서, 지금 살고 있는 집과 이 동네에 더 감사한 마음을 가지라고 이런 일이 일어난 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어쩌면 너무 오래 사는 동안 익숙해져서 이 집이 내게 얼마나 고마운 집인지도 다 잊어버리고, 불편한 점만 쳐다보며 스트레스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이러다 갑자기 이사를 가야 하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이 고마웠던 동네를 떠나는 일이 얼마나 아쉬우려나.


이번에 이사를 고민하면서 새로운 동네에서 사는 설레는 내 모습을 상상한 만큼, 익숙한 지금의 동네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점들도 많았다. 그래서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삶이 허락하는 동안은 이 집에서 좀 더 무의식적이고 무계획적으로 살아보려 한다.


감사한 마음을 한 스푼 더한 채로.








- Statista 독일 도시 월세 순위 출처: https://de.statista.com/statistik/daten/studie/1885/umfrage/mietpreise-in-den-groessten-staedten-deutsch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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