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연애 초기부터 자신은 삶에 큰 미련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60살 정도만 살면 삶을 종료해도 될 것 같다고 한다. 여전히 산다는 건 재미없고 지겹다는 식으로 말할 때도 있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새로운 걸 배우고 싶어 하고, 안 해 본 걸 해 보자 하고, 여행을 가자 하는 거지? 사는 게 지겨운 사람이 뭐 그래?”
“사는 게 지겨우니까 그런 거지.”
맞는 말 같기도 하고 궤변 같기도 하다.
할 수 있는 한 오래 살아 있고 싶은 나와는 많이 다르다는 건 결혼하기 전에도 알고 있었다. 일상의 즐거움을 추구한다고 해서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하지 못할 이유는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건 사실이다. 하긴 역으로 오래 살고 싶어 한다고 해서 사는 게 너무 행복한 것도 아니다. 이러나저러나 생각대로 되는 일도 아니고.
“나 60살에 죽으면 오빠는 다른 여자 만나서 또 재밌게 살면 되잖아.”
아내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의 다음 사랑을 응원한다.
“죽긴 왜 죽어? 나랑 120살까지 살 건데.” 하면, 아내는 지겹다는 듯 진저리 친다. 나는 순식간에 흘러간 지난 20년을 생각하고 남은 20년이 얼마나 빠르게 우리를 스쳐 지나갈지를 생각하며 진저리 친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이유로 진저리 치며 잠시 시간에 대한 상념에 빠진다.
그런 대화의 연장선상에서 아내는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나도 좋다고 말한다. 그런 이야기는 불륜이나 바람 따위 치정 뉴스나 콘텐츠를 볼 때 이어지곤 한다.
“다른 여자 만나고 싶으면 만나. 대신 나한테 들키지만 마. 그럼 상관없어.”
“그러다가 다른 사람이 좋아져서 헤어지자고 하면?”
“그럼 헤어지는 거지 뭐.”
“…….”
나는 깊게 고민하지 않고 그런 말을 쉽게 꺼내는 아내에게 서운한 건지 뭔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된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나도 그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내가 싫어 떠나는 사람은 붙잡지 않는다는 신조 같은 걸 가지고 있다는 걸 드러냈다. 그러면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는 듯이. 그런데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모르겠다. 아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나를 떠나는 상황을 가정해 그려보았다. 붙잡지는 않을 것 같다. 아니 붙잡을 수 없을 것이다. 방향을 바꿀 수 있는 키가 내게 쥐어져 있지 않다. 불가항력. 내 마음이 아닌 마음에는 손댈 수 없는 법. 보내긴 하겠지만, 나는 아내가 떠난 빈집에서 아내를 자주 그리워하고 허전해할 것 같다. 커다란 상실감에 많이 괴로울 것 같다.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떠났기 때문이 아니고 아내가 없기 때문에. 그러니 내가 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면 ‘그냥 헤어지면 말지’라고 쿨한 척 말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설사 그렇게 허세를 부린대도 그 말속에는 전과는 달리 구체적으로 슬픈 감정이 담기게 될 것이다.
아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말하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세상 무엇보다 소중해' 우리를 부부가 되게 한 주문이다. 우리 각자가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고 우리는 각자를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상대를 소중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고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나는 상대의 존재감이 있다. 그게 아우라라는 거라면, 아우라가 겹쳐도 서로 방해받거나 방해하지 않고 뾰족하게 찌르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상대의 방어막이 나를 내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해할 수 있다. 내 방어막으로 상대를 방어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내 방어막이 상대를 내치지 않도록 거둬들일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우스갯소리는 한 발 더 나간다. 이상형과의 하룻밤에 대해서다.
그다지 궁금하지 않지만 묻곤 하는 누군가의 이상형. 이상적인 이성의 상(像) 같은 게 확실하게 있기 어려우니 사람들은 대부분 연예인 같은 유명인의 외적인 형상, 즉 이미지를 불러내 답한다. 제일 간편한 방법이기도 하다. 아내는 이십 대 때 한창 좋아했다는 키 큰 배우의 이름을 불러낸다. 장모님은 나를 처음 만난 후에 키가 ‘쬐깐해서’ 다소 놀라셨다고 했다. 아내가 키 큰 남자가 아니면 만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셨는데 의외였던 거다. 그만큼 나는 아내의 ‘외적인’ 이상형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모님은 모르고 계신다. 아내도 나의 이상형이 아니긴 마찬가지라는 걸. 이러나저러나 생각대로 되는 일은 없다.
나는 아내의 외유를 허락한다.
“혹시 살다가 정말로 우연히 그 배우 OOO이랑 만나게 돼서, 정말로 우연히 그 배우도 허락해서 하룻밤을 보낼 일이 생긴다면……자도 좋아. 특별히 허락해 줄게.”
어차피 있지도 않을 일, 쿨한 농담을 해 보는 건지 진심으로 그래도 좋은지 나는 말을 꺼내고 나서야 생각한다. 일종의 사고 실험을 해 보는 것이다. 정말로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가 조금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아내는 그 배우와의 하룻밤을 그려보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다. 쓸데없는 농담으로 상처받은 건 나 자신뿐.
그러다가 알게 된다. 아내가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걸.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선택은 아내가 한다. (이상형 배우와의 하룻밤이라니, 어차피 출발부터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다. 그러므로 상대가 그 배우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가정하게 되어 앞서 상상한 슬픔을 반복하는 꼴이다.) 아내가 그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나에게 미안한 감정으로 망설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에게 미안해서 이상형과의 하룻밤을 포기하는 것도 슬프긴 마찬가지다. 그러면 내가 미안해질 것 같다.
쓸데없는 상상은 여기까지다. 우리 부부는 쿨한 척 서로를 구속하지 않겠노라 말한다. 아마 우리에게 그와 같은 일이 생긴다면 실제로 그렇게 할 것 같다. 상대방의 의사대로 다음 길을 가도록 허락할 거라는 뜻이다. 그건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그렇다.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히 여기면서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듯이, 자기 자신이 소중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보내줄 수도 있다. 서로 그걸 잘 알아서 결혼한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각자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구체적인 상상이 결여된 우리의 말장난은 그러므로 무해하지만 미지의 불안을 품고 있다. 맞는 말 같기도 하고 궤변 같기도 한 말을 서로에게 하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우선은 같이 살아 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