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이든 식탁이든 선반이든, 어디를 떠올려도 좋다. 당신은 넓은 면으로 이루어진 물체 위에 휴대폰을 어떻게 올려 두는가?
1. 책상/식탁/선반의 중앙에 가깝게, 휴대폰의 면이 모두 올라가도록 둔다
2. 책상/식탁/선반의 어디에든, 휴대폰의 면이 모두 올라가도록 둔다
3. 책상/식탁/선반의 모서리 부분에, 휴대폰의 면이 꽤 많이 걸치지만 약간 튀어나오도록 둔다
4. 책상/식탁/선반의 모서리 부분에, 휴대폰의 면이 절반 정도 걸치고 절반 정도 튀어나오도록 둔다
나의 아내는 보통 4번이고 가끔 3번이다. 우리 집 식탁에는 언제나 아내의 휴대폰이 반쯤 걸린 채 올려져 있다. 살면서 한 번도 3번이나 4번의 형태로 휴대폰을 둔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아내의 휴대폰이 식탁 모서리에 위태롭게 걸쳐 있는 그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우연인 줄 알았다. 그래서 조용히 휴대폰을 밀어 안전하게 올려 두었다. 그런데 같은 일을 몇 번 더 겪으면서 우연이 아닌 건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 정도면 절대로 우연이 아니구나, 확신한 어느 날 마침내 나는 아내에게 나의 ‘이해할 수 없음’을 토로했다.
“대체 왜 휴대폰을 이렇게 두는 거야?”
아내의 첫 번째 대답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의미였고(“내가?”), 두 번째 대답은 매우 심플했다.
“잡기 편하잖아.”
그렇게 두면 잡기 편하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의미로 나는 “이게?”라고 되물었고, 튀어나온 휴대폰을 보는 내 마음속 불안함과 위태로움에 대해 호소하다시피 말했다. 아내는 쿨하게 웃으며 ‘그런가?’라고 했고 그 후로도 쭉 휴대폰을 그렇게 둔다.
사실 휴대폰만 그런 게 아니다. 휴대폰이면 양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길쭉하게 입이 좁은 꽃병은 어떤가. 아내가 주방에서 꽃을 손질하는 모습을 보고 아름다움에 감탄해야 마땅하건만 꽃병이 놓인 곳을 보고 나는 불안함에 탄식한다. 꽃병은 개수대의 얇은 모서리 위에 ‘얹혀있다’. 저 평평하고 넓은 싱크대 상판을 두고 왜 저 꽃병은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 중심을 잘 잡아 두어서 문제없다고 아내는 말하지만 내 눈에는 문제가 없지 않으니 문제다.
다행스럽게도 아내가 그런 식으로 걸쳐 놓은 물건들이 떨어져서 박살이 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나와 사는 동안에는 그런 적이 없다. 당연히(!) 같이 살기 전에도 그런 적이 없다고 아내는 말하지만, 입꼬리에 웃음기가 매달려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기에 나는 그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가 없는 입장이다.
나는 물건을 반쯤 걸쳐 놓는다고 집어 들기가 더 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물건을 걸치지 않고 온전히 올려 두어도 집어 드는 데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얘기다.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에 아내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잡을 부분이 튀어나와 있으면 ‘약간’ 더 편할 수도 있겠다고 아내를 이해해 보려고도 했는데 마음속에서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있는 나를 발견할 뿐이다. 백번 양보해서 그게 약간 더 편하다고 해도 그 물건이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할 정도는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나에게는 효용보다 비용이 훨씬 큰 손해 보는 거래인 셈이다.
이 부등식을 아내에게 대입해 보니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내에게는 그 ‘편함’이라는 실질적 효용이 ‘불안함’이라는 감정적 비용보다 더 큰 것이로구나.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 정말 아내에게 편함이라는 효용이 그렇게 클까? 정말 그 정도라고?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찜찜했다. 내 머릿속에서는 내가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했을 때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한 아내의 반응과 장난스러운 웃음, 물건에 집착하지 않는 평소의 언행들이 회오리 모양으로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마침내 로또 기계가 소용돌이 속에서 번호가 적힌 공 하나만 쏙 골라 게워내듯이 간결한 답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아내는 불안하지 않은 거구나!
다른 말로 불안함이라는 감정적 비용이 제로에 가까운 거다. 그렇다. 아내는 휴대폰이나 리모컨, 꽃병이나 물병을 모서리나 가장자리, 좁디좁아서 아슬아슬해 보이는 선반 위에 올려 두고도 불안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 거였다.
나는 물건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아내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아내는 그럴 거라고도 그렇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내는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이건 아내가 가진 꽤 중요한 특성 중 하나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이기도 해서 아내의 이 특성을 이해하는 건 우리 부부에게 중요한 일이 된다.
호모 사피엔스는 과거와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을 갖추면서 위험에 대비하고 예방할 수 있게 됐고 비약적으로 수명을 늘려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상상력’이 우리에게 위태롭고 쓸데없는 모험을 하지 않아도 되는 안락한 길을 열어 주었다. 우리를 보호해 주는 일종의 정신적 울타리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위험을 ‘예측’해서 안전한 방안들을 선택한다. 그런 선택들이 쌓여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니 꽃병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 가정하는 건 안전을 위해서나 시간적 금전적 손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나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왜 난 아내에게 진 기분이 드는가? 왜 위태롭게 올려져 있는 꽃병을 보고 나만 불안한가 말이다. 아내는 콧노래를 부르며 꽃을 다듬고 있는데…….
“미리 걱정해서 뭐 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래의 걱정을 끌어다 현재에 쓰지 않는, 현재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능력까지 갖췄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사람이다. 저렇게 쿨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실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마음은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걱정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채 우리는 불안을 껴안고 살아간다. 미래라는 단어 속에는 언제나 그놈이 똬리를 틀고 있지 않던가.
솟아오르는 걱정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대비하고 준비하고 저축하고 보험 들고 살지만, 그런다고 대비가 되는 건지 확실치 않으니 잠들지 않은 걱정과 불안이라는 녀석들은 기가 살아서 더욱 우리를 짓누른다. 미래 속에 똬리를 튼 녀석들에게 현재를 빼앗기고 만다.
어떤 영상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아이돌 가수 출신으로 중년이 넘은 연예인이 그즈음 잘 나가던 인디밴드 멤버들을 만난다. 이 연예인은 거리낌 없이 누구에게나 편하게 말을 걸어서 인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밴드 멤버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이 사람은 멤버들의 팔뚝 여기저기에 낙서처럼 그려진 문신을 보고 한마디 한다. ‘너희 나중에 할아버지 되면 꼬마애들이 물어볼 거야. 할아버지 젊었을 때 쓰레기였죠? 하고.’ 정확하진 않아도 이런 취지의 이야기였다. 젊은 시절의 객기로 인해 나이 들면 후회하게 될 거라는 식의 걱정과 훈계 같은 말이었는데, 그 영상을 보며 나는 석연치 않은 기분이었다. 말이 너무 세서였을까? 그냥 허허 웃고 별 대답하지 않는 밴드 멤버들이 답답해서였을까? 아니면 그 연예인의 말에 가득한 편견 때문이었을까?
그러다 어느 날 폭풍우 치는 제주 바닷가에서 집채처럼 무너지는 파도를 보다가 깨달았다. 왜 그 말이 불편했는지. 나는 그때 이십 대 때 보았던 제주도의 바다를 떠올리며, 바다는 언제나 그대로인데 나는 몸도 마음도 늙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죽음이 한 발짝 다가와 있었다. 인생무상. 가끔 찾아오는 허무함을 반갑게 맞이하며 나는 이십 대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미래는 불확실했지만 이상한 확신과 자신감이 있던 그때. 절대 보험 따위 들지 않고 자동차를 사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젊은 날을. 그러자 퍼뜩 그 영상의 장면이 떠올랐고 마음이 석연치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됐다. 이미 젊음으로부터 멀찍이 쫓겨난 자가 젊음의 한가운데에 선 자를 질시하는 것처럼 느껴져 그 나이 든 연예인이 불쌍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그와 비슷하게 먼 미래를 바라보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됐을 때를 떠올리며 문신을 새기는 젊음은 없다. 노인이 됐을 때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젊음이다. 주변을 다 불태워버리고 싶고 자기 자신도 불태워버리고 싶다가도 알 수 없는 오기와 열기에 휩싸인 자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나이 든 사람들의 비겁한 모습이 보기 싫어 저렇게 추하게 늙기 전에 죽어야지, 결심하기도 하는. ‘지금’이 가장 중요해서 ‘지금’의 문제로 치열하게 고민하는. 젊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몰라서 그냥 낭비하고 마는. 젊음.
젊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 정해진 건 아니겠지만, 현재를 저당 잡아 미래를 대비하는 모습이 내게는 젊은이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거죽은 젊어도 속은 다 늙어버린 사람처럼 보인다. 남들이 뭐라 하든, 늙어서 어떻게 되든, 낙서 같은 문신을 하고 중년의 아저씨가 뭐라 해도 그냥 웃고 마는 게, 철없어 보일지언정 젊은이로 보인다.
젊은이는 어차피 살다 보면 젊지 않게 되기 때문에 점차 ‘상상력’을 발휘해 대비하고 예방하며 생을 연장하게 된다. 삶은 자연스레 우리를 불안과 평안으로 만들어진 양팔 저울 위에 세워두고 죽을 때까지 위태롭게 흔들리며 균형을 잡아가며 살게 만든다. 안락한 길을 걷고 있을지라도 언제든 구렁텅이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걸 ‘늙은이’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세상은 그런 걸 연륜이라고 부르며 상찬하지만, 연륜이 깊은 사람들이 가장 욕망하는 건 ‘젊음’이라는 아이러니를 어찌할 것인가.
그러니 나는 일상에서라도 조금은 젊어지기로 한다. 쓸데없이 걱정하지 않고 멀리 보지 않으며 불안을 느끼지 않는 길로 걷기로 한다. 적어도 벌어지지 않은 일을 미리 두려워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아내처럼 살기로 한다.
맥주병을 식탁 모서리에 반쯤 걸쳐 세워두고 아내에게 걱정 없는 웃음을 보여줘야지. 고등학교 때 하고 싶었던 문신을 팔뚝에 새기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놀래줘야지. 등짝 스매싱이 날아올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나는 이제 젊지는 않지만 젊었을 때보다 훨씬 뜨겁게 아껴지고 있구나. 사랑받고 있구나!
같이 흔들리며 늙어갈 사람이 있어서 안심이 된다. 튀어나온 아내의 휴대폰은 내가 안전하게 올려 두면 된다. 그러니 문신을 할 필요는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