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을 함께 다니다 보니 왜 아내가 길치인지 알게 됐다.
아내는 동네에서 수십 번은 갔던 곳도 다른 길로 들어서면 방향을 찾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곤 한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다. 설마, 하고 생각했던 거다. 어느 정도냐면, 좀 과장해서 기억자로 갈 길을 니은자로 가기만 해도 헷갈려하는 수준이다. 그러니 걷다가 종종, “엥? 왜 이게 나오지?” 하고 놀랄 때는 어이가 없기도 하다. 속으로는, ‘당연히 이게 나오지. 왜냐면 이 건물은 원래 여기 있었고, 우리는 수도 없이 이 건물 앞을 지나쳤거든. 단지 다른 곳에서 출발했을 뿐인데 이게 왜 여기 있냐고 놀라는 당신이 더 놀랍구려.’ 하지만, 겉으로는 걱정을 담은 말투로 ‘당신은 지금까지 대체 어떻게 살아온 것인가’ 하고 놀린다.
아내는 이 험한 세상 복잡한 길을 어떻게 헤치고 걸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인가.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놀랍기도 하다. 어떻게 길을 잃지 않고 제때 올바른 곳으로 나를 찾아올 수 있었는지. 문득 엉뚱한 길로 새지 않은 아내와 나의 운명에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운전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내가 내비게이션 없이 운전을 할 수 있는 건 수없이 반복했던 출퇴근길뿐이다. 요즘 세상에 내비게이션 없이 어디든 찾아다니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거다. 나도 내비게이션 없이 차를 몰아 초행길을 가는 건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는 해도 몇 번 갔던 길을 생전 처음인 것처럼 낯설어하지는 않는다. 수십 번 갔던 곳도 내비게이션이 다른 길로 알려주면 방향감각을 완전히 잃고 마는 아내는 전국의 수많은 길치 중에서도 꽤 상위권이 아닐까 싶다.
어느 날 아내와 어딘가를 찾아가다가 길을 확인해야 해서 휴대폰의 지도앱을 켜서 함께 보다가 분명히 알게 됐다. 왜 아내가 길치인지를.
아내는 지도와 자신이 서 있는 방향을 무조건 위로 향하게 맞춘 뒤에 길을 찾는다. 동서남북 방위는 의미가 없어지고 지도를 펴서 보는 그 순간에 서 있는 방향이 북쪽이 되는 거다. 그래서 전라도를 향해 남쪽으로 가는 길에 어디쯤 왔나 확인할 때도 아내의 지도를 보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위쪽으로 뻗어 있다. 한반도는 뒤집혀 있고.
이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냐고 아내는 의아해했다.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길을 찾는 사람이 아내뿐일 거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길만 잘 찾아가면 된다. 설사 헤맬지라도 그건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단지, 그로 인해 아내는 길치인 게 확실하다는 걸 알게 됐다는 얘기다.
서울의 지하철역은 주로 사거리에 사방으로 여덟 개의 출구를 갖는 경우가 많다. 잘못된 출구로 나왔다면 주요 지형지물이 어느 쪽에 있는지를 파악해 제대로 된 길을 찾아갈 수 있다. 그런 경우에 아내는 자신이 원래 나오던 출구의 방향을 기준으로 앞쪽에 있어야 할 것이 없으면 당황한다. 아마 머릿속으로는 지도의 방위를 자신이 선 방향으로 맞추느라 바쁜 것 같다.
그러니까 아내는 내비게이션처럼 수시로 방향이 이리저리 바뀌는 지도 위에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아내의 머릿속에 세상의 지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아내가 바라보는 방향에 맞춰 지도가 움직인다.
지금 A 빌딩이 어느 쪽에 있지? 내가 묻는다.
오른쪽. 아내가 답한다.
그럼 전에 찾아갈 때는 A 빌딩이 어느 쪽에 있었지?
왼쪽.
그럼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면 뭐가 나오지?
… 몰라, 그걸 알아야 돼?
이렇게 수수께끼는 질문이 되어 돌아온다. 이렇게 쓰고 보니 애초에 질문한 내가 재수 없어 보이는 면도 없지 않음을 부정할 순 없다.
방위가 고정된 지도상에서 내가 서 있는 곳과 주변 지형과 목적지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의 방위를 내가 서 있는 방향을 기준으로 돌려서 맞추는 일. 그렇게 길 안내를 따라 목적지를 찾아가는 일. 가는 길에 몇 번이나 손에 든 휴대폰을 이리저리 돌려 방향을 맞춰보는 일. 이것들이 아내를 길치의 길로 이끌어 왔다. 아내는 그저 해맑게 길치의 길을 걸어왔을 뿐,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내에게 분석한 결과를 브리핑하니 그런 것 같다고 인정했다.
“맞아. 난 그래.”
아내는 자신을 중심에 놓고 세상을 본다. “맞아. 난 그래.” 이것 역시 인정했다.
이건 아내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내는 자존감이 높고 사람과 사물과 주체적으로 관계한다. 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적고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그래선지 엉뚱한 매력도 있다. 그렇다고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다거나 이기적이라는 건 아니다. 사회화는 잘 되어 있으니 걱정할 건 없다. 다만 상대가 말할 때 듣지 않다가 자신이 머릿속으로 하고 있던 생각을 툭 꺼내 말을 끊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자기중심적인 면이 보일 때도 있다. 예민한 나는 특히 이것 때문에 아내와 많이 다퉜는데, 길 찾기를 통해 알게 된 아내의 특성을 이해하고부터는 화가 나지 않고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할 때가 많아졌다.
우리는 모두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두고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우리의 지도에는 신경 써야 할 존재들이 무수히 흩뿌려져 있다. 여기저기 표시된 사람들과의 관계와 경중을 파악해 가며 목적지를 향해 간다. 눈치 보고 비위 맞추느라 진짜 나는 어디에 내팽개쳐 둔 건지도 모른 채, 빈 껍데기만 짊어지고 어딘지도 모를 목적지를 향해 허덕이며 걷는다.
나는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걷는다. 가장 짧은 길로 가장 효율적으로. 앞사람이 길을 막으면 분노하면서 걷는다. 헤매지도 않고 속도도 빠른데 뭘 보면서 걸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제때 제 장소에 도착은 한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아내는 두리번거리고 헤매지만 언제나 새로운 길 위에 선다. 남에게 조금의 피해도 주지 않고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으로 나아간다. 아내는 가야 할 길이 앞/위/북쪽으로 오도록 지도를 돌려 자신의 방향과 맞춘다. 아내의 길은 앞으로 뻗어 있다. 설사 잘못 와서 왔던 길을 되돌아갈 때도 길은 앞으로 깔린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옆으로는 걸을 수 없다. 언제나 앞으로만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아내의 길만 그런 건 아니다.
‘어쨌든’이 지워버린 길의 풍경은 언제나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서둘러 걸으며 아내가 길 위에서 헤매면 여전히 답답해한다. 누가 길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