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세상에 태어나는 바람에 하나씩 갖게 된 기념일을 기념하는 일이 언젠가부터 멋쩍다. 우리가 뭘 했다고 생일을 기념하고 축하를 받는 건가.
‘어쩌다’ 태어나는 바람에 이 고생스러운 생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 모두 축하받을 자격이 있다고 서로 등 두드려 주는 의식 같은 거라고 생각해도 될 텐데, 어쩐지 좀 닭살이 돋는다. 팍팍한 일상에 단비 같은 이벤트이리라 좋게 웃으며 넘겨도 될 것을 요란스러운 생일 축하나 파티 같은 건 철없는 애들 장난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생일 선물을 주고받는 일은 더더욱 의미를 상실한 의식처럼 느껴진다.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하며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을 지닌 적이 있나 떠올려 보면 단언컨대 그런 적이 없다. 전부 거짓말이었던 거지. 축하를 받으면서도 시큰둥할 수밖에.
아내의 생일 이벤트는 그래서 더 어이없게 느껴졌다. 아내가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벤트가 아니라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는 이벤트 얘기다.
아내를 사귀고 처음 맞이하는 그녀의 생일이 다가오자 어떤 선물을 해야 하나 고민됐다. 앞서 말했듯 생일을 기념하는 것에서 별 의미를 느끼지 못하니 축하해 주는 법도 잘 모른다. 그러나 몇 번의 연애 경험으로 어느 정도 학습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남자친구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은 놓치지 않고 했다. 가끔은 센스 없게 대놓고 물어보는 것이 오히려 센스 있을 수도 있다는 것도, 배웠다. 갖고 싶지만 자기 돈 주고 사긴 아까운 것이 선물로 제격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왕이면 그런 걸 고르기를 바라며 센스 없는 척 여자친구(현 아내)에게 물었다. “뭐 받고 싶은 거 있어?”
“아니.”
그녀는 별로 받고 싶은 게 없다고 말했다. 함정에 빠지지 않은 자신을 대견해하며 다시 한번 그녀의 마음을 떠보았다. “부담 갖지 말고 쓸모없지만 갖고 싶었던 게 있으면 말해봐.”
“그런 거 없어.”
그건 정말이었다. 여자친구는 나에게 별다른 선물을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선물 없이 생일을 축하해줘야 하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난관에 봉착했다.
그녀는 생일이 있는 주에 바쁘다고 말했다. 만나야 할 사람이 많아서 스케줄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달력을 보며 나와 언제 만날 수 있는지 날짜를 정해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달력에는 생일 앞뒤로 빽빽하게 만날 사람들이 쓰여 있었다. 그녀는 생일 주간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 말은 어느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반복되는 전언처럼 의미심장했다. “The birthday is coming”
아내는 자신의 생일이 다가오면 그동안 바빠서 못 만났지만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만난다. 일부러 약속을 잡고 될 수 있으면 자신이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1년에 한 번도 못 보고 지나가게 되는 것이 싫어서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생일을 기념한다고 했다. 꽤 신선한 방식이다. 게다가 이타적이고 자기희생적인 면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고 싶어서 가는 것뿐인데.”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사실 이기심에 뿌리내리고 있다. ‘나’는 언제나 나에게서 뻗어나가는 화살표의 원점이다. 자신의 욕망만을 담고 화살은 외부로 날아간다. 일방적으로. 물론 한쪽만 보면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관계 맺어져 있다. 내가 보낸 것보다 더 큰 화살이 나를 겨냥하고 날아오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나만큼 나를 원하지 않기도 한다. 그 마음들의 오감이 눈에 보이지 않고 계량할 수 없어서 인간 세상은 복잡하고 다양하며 재미있어진다. 누군가를 보고 싶은 마음은 이기적이지만 일방적이지는 않다.
그저 각자 생활이 너무 바쁘고 각박할 따름이다. 안부 인사나 건네며 다음에 한번 보자 한 마디로 만난 것과 다름없이 지나간다.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를 뿐이다. 그러니 과거에 친했던 누군가가 나를 보러 와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이미 볼 마음이 없어질 만큼 틀어진 사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아내가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는 방식이 자기희생적이며 이타적인 면이 있다고 본 것이다. 게다가 보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않으니 솔직하다.
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의아함뿐 아니라 호기심도 생긴다. 당시 여자친구의 많은 면이 이해되지 않았지만(물론 지금도 마찬가지)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식으로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는 건 이해되지 않는 것 중 좋은 쪽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하는 생일 기념 이벤트가 하나 더 있다. 이건 이해되지 않는 것 중 좋지 않은 쪽에 속한다. 더 간단하고 자족적이지만 여러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자신의 생일 전에 카카오톡 메신저에 간단한 이벤트를 공지한 후에 당첨자에게 선물을 주는데, 예컨대 n번째(자신의 생일과 관련된 숫자)로 축하 메시지를 보낸 사람, 자신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보내준 n명(역시 자신의 생일과 관련된 숫자), 자신과 관련된 퀴즈 문제를 내고 정답을 맞힌 n명(또한 자신의 생일과 관련된 숫자)처럼 뭔가 자신과 연관된 지인들의 리액션을 필요로 하는 이벤트를 개최한다. 선물도 대단치 않다. 커피 상품권이나 바나나우유 교환권 따위 아주 소소한 것들이다. 내가 이 이벤트를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순전히 나 자신의 편협함 때문이다.
서두에서도 밝혔듯 생일이라는 게 축하하거나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지 않기도 하지만, 설사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해도 스스로 자신의 생일을 기념해 타인의 축하를 유도하는 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어린이들의 그것만큼이나 여과 없는 자의식의 표출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내가 여자친구의 단순한 지인이었다면 ‘절대’ 그 이벤트에 참여하지 않았을 거다. 내가 가진 삐딱함은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눈곱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식으로 표현된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들리는 유명인들의 잡다한 추문은 그 자체로 공해다. 그러므로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 이벤트에 참여함으로써 ‘당신이 세상의 주인공입니다’하는 액션을 취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NOFX의 “Happy birthday you’re not special.”이라는 노래 가사의 냉소주의가 내 마음을 대변한다. 또 마치 선물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싫다. 자존심이 상한다. 마지막으로 ‘축하’는 ‘하는 사람’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강요받을 수 없다. 할지 말지는 ‘하는 사람’이 판단하고 주체적으로 결정할 일이다.
나는 이런 내 생각을 조금 정제하여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있는 그대로 말하면 조금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 문제일 테니까. 여자친구에게 이벤트를 하지 말라고 말할 권리는 내게 없다. 나는 남자친구로서 축하할 뿐 이벤트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녀는 내가 그러든 말든 별로 개의치 않았고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생일에 그런 이벤트를 한다.
생일 아침에 아내의 휴대폰에는 생일 축하 메시지와 선물이 가득하다. 나는 그 친구들이 지닌 따뜻하고 선한 마음에 경의를 표한다. 더불어 아내가 주변 사람들과 쌓아온 관계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 이벤트는 이해되지 않으며 자존심이 상한다.
좀 이상한 건, 왜 내 자존심이 상하는가, 이다. 사실 나는 아내의 생일에 아내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있다. (누가 자의식 과잉인가?) 아내는 순전히 재미로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는데, 옆에서 혼자 심각해진 얼굴로 사람들이 아내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고민하는 나를 발견한다. 사람들로부터 아내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가진 방어막을 아내에게 둘러쳐 주려는 것이다. 그걸 아는 아내는 내 마음을 고맙게 받아주면서도 자신의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다. 아내는 먼저 찾아가고, 작더라도 선물을 나눠주는 방식으로 자기의 탄생을 기념한다. 나에게 선물을 바라지 않는다. 며칠 전 결혼 후 세 번째로 맞는 아내의 생일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실 아내도 생일에 큰 의미를 두고 있어서 이벤트를 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인생에 작은 즐거움 하나 추가해 보려는 걸지도.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아내의 생일 이벤트를 생각하며 그것이 내키지 않는 이유를 여러 개 찾아냈다. 그것을 생각하며 나는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했다. 별로 즐거운 일은 아니다. 아내는 ‘즐겁게’ 생일을 즐기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한편 나는 이 글을 쓰며 싫어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를 찾게 되는 나를 발견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땐 단순해도 좋다. 아내가 이벤트를 ‘그냥’, ‘재밌어서’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그러나 싫어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주 명확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더 집중하고 파고들어서 찾아야 한다. ‘그냥’ 싫은 건 너무 폭력적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나는 단순하게 좋아하고 복잡하게 싫어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복잡한 건 골치 아프니 그저 단순하게 즐거운 길을 찾아가는 게 현명한 일인 것 같다. 역시 아내는 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