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을 몇 달 앞두고 아내가 살던 집을 정리하고 내가 살던 빌라로 아내의 짐을 옮기면서 우리의 신혼은 시작됐다. 아내는 단출한 살림살이를 가지고 살았다. 가전제품은 세 들어 살던 집에 옵션으로 딸린 것들을 사용했다. 오래되어 새로 사기로 한 몇 가지 가구를 처분하고 나니 남은 건 의류와 주방용품, 그 외 생활용품 잡동사니가 전부였다. 옷이나 신발은 적다고 할 수 없었는데, 아내는 옷이 ‘예의’의 기본이라 생각하고 예쁜 옷 입기를 즐기기 때문에 다른 물건에는 욕심이 없어도 옷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내가 직접 산 가전제품은 의류관리기가 유일했다. 삶의 컨셉이 뚜렷한 사람이지 않은가?
아내가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나는 좋다. 단출한 살림살이가 말해주듯 아내는 언제든 훌쩍 떠날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산다. 소유보다 경험을 가치 있게 여기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후회 없이 살고자 하는 아내의 인생관이 반영된 삶의 단면이다. 말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책이든 피규어든 한 번 사들인 것은 버리지 못하고, 생활에 구색을 갖추려고 애쓰는 나는 그에 비하면 소유욕이 강한 편에 속한다. 나름은 쓸데없는 것은 소유하지 않고 물자를 아낀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쓸 데 있고 없음의 기준이 남들과 다를 뿐,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살고 있음을 이제는 인정한다. 아내에게 훌쩍 떠나자고 말하는 건 언제나 나이지만 정말 훌쩍 떠나게 된다면 그건 아내에 의해서일 거다. 아내는 떠나자는 나의 말을 무시로 흘려듣는다. 내가 손에 쥔 것들을 쉽사리 놓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나의 퇴사는 1년 뒤, 1년 뒤 하다가 10년이 넘게 미뤄지고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금저축에 가입할 것을. 10년이나 회사를 다닐 리가 없다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는데,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아내는 다른 것들에 집착한다. 특정하게 정해진 뭔가가 아니고 그때그때 의식을 사로잡는 게 있을 때 집착이 시작되는데 그게 꽤 끈질기다. 강력계 형사 출신인 장인어른의 영향인 것 같다고 아내 스스로는 분석하고 있는데, 어린 시절 장인어른은 평소에 가족들에게도 뭔가를 알아내고자 할 때면 용의자 취조하듯 묻곤 하셨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가족들은 강력계 형사의 찌르는 듯한 눈빛 앞에서도 겁먹지 않고 비밀을 간직하는 법을 배웠지만 형사처럼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끝을 보는 면도 배웠다.
연애 시절 아내가 나에게 별거 아닌(정말 별거 아니라 기억도 나지 않는) 뭔가를 주기로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받으러 아내의 집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조금 귀찮아져서 내일 받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날 꼭 필요한 물건도 아니었다. 그러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문 앞에 나가보라는 메시지가 왔다. 문 앞에는 그 물건이 담긴 봉투가 놓여 있었다. 집까지 와서 물건만 놓고 가버린 것이었다. 아내는 기분이 상한 걸까? 무엇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우리는 함께 그 이유를 탐구해 봤는데 토론 끝에 밝혀진 결론은, ‘오늘 주기로 한 물건을 주지 않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물건이 다음날까지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난 그 물건을 오늘 받는 게 ‘약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내에게는 중간에 계획을 바꾸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거였다.
어느 땐가 커피 브랜드의 이벤트 상품에 꽂히면 상품을 받기 위해 커피 음용 횟수를 채우는 일에 심하게 집착해서 반드시 열몇 개의 도장을 모아서 상품을 받고야 마는데, 막상 받은 상품은 없어도 그만인 취급을 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 횟수를 모으는 것 자체에 빠지는 것이다. 요즘은 블로그 체험단에 빠져서 여기저기 음식점이나 카페를 다니느라 바쁘다. 그 횟수가 너무 많아져서 아내 스스로도 조금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새로운 가게가 나오면 또 신청을 한다. 이것도 일종의 집착이다. 의지로 충분히 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을 의지를 갖고 끝까지 하기 때문이다. ‘중독’은 의지로 해결이 안 되니 종속적이고 그래서 조금 안쓰러운 면이 있는데 ‘집착’은 과장된 자의식이 불필요하게 대상을 추구하는 면이 있어서 징그러운 느낌이 들게 한다. 굳이 왜 그러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아내가 징그럽다는 건 아니지만 집착도 중독만큼 해로울 수 있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요즘 아내의 집착이 최고조로 발휘되는 분야는 집안 배치다. 가구나 소품의 배치가 성에 차지 않는 한 이 집착은 끝나지 않는다. 이 집착이 시작되면 아내의 모습을 한 그분이 슬며시 나타나신다. 집안의 어느 장소나 사물의 위치가 갑자기 눈에 거슬려서 참지 못하는 그분이…. 계속해서 조금씩 달라지는 집을 보자니 그분은 앞으로도 당분간은 우리 집에 찾아오실 것 같다.
전에 살던 집에서도 그분은 자주 왔다 가시곤 했다. 그분이 왔다 가시면 가구나 물건들의 배치가 달라지곤 했다. 퇴근하고 오면 커다란 소파나 책상이 거실에서 방으로 들어와 있다. “이걸 어떻게 옮겼어? 혼자 옮겼어? 나랑 같이 하지.” 하면 그냥 배시시 웃는다. 남자의 도움 따위 필요 없다. 지금 하고 싶으면 해야 한다. 처음에는 내 도움이 필요 없다는 사실이 섭섭했다. 그런 데 쓰라고 있는 남편이 아니던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그 후로도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무거운 물건들을 수시로 옮겼다. 자잘한 수납용품을 사서 여기저기 붙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성에 차자 옮기기를 멈췄다. 비로소 작은 빌라의 물건들은 평화롭게 정주할 수 있었다.
그 빌라에서 아파트로 이사한 지 이제 석 달이 됐다. 이사하고 한 달이 지났을 때 그분이 다시 찾아오셨다. 마침 그즈음 아내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최적의 온도와 습도, 일조량이 조화를 이룰 때 식물이 무럭무럭 생장하듯, 이사와 퇴사는 그분이 나타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기에 그분은 이제 빈번하게 우리 집에 방문하신다.
나로서는 재미있기도 하다. 나라면 몇 년을 살아도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았을 집 내부의 모습이 수시로 바뀌니 일상에 신선함이랄까, 그런 게 있다. 또 집착이 심한 만큼 아내가 추구하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고, 그게 내 취향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을지라도 수긍할 만한 보편성을 갖추고 있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사람들은 집을 ‘잘 꾸몄다’고 말한다. 아내가 손대면 꽤 보기 좋아진다. 하지만 집착은 선을 넘기 때문에 집착이 아니던가. 누가 봐도 충분히 배치가 잘 되어 생활에 불편함이 없고 심미적으로 양호한데도 아내는 아직도 불만족스럽다. 여전히 물건들은 여기저기로 이동하고 새로운 수납용품이 설치된다. 밥을 먹거나 노트북 하기 편했던 거실 테이블과 의자가 방으로 치워져 있던 어느 날 나는 연애 시절 그랬듯 아내와 함께 그 이유를 탐구해서 그만두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내는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내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뭔가 딱 마음에 안 들어. 안 보였으면 좋겠는데 보이는 것들이 싫고 이 방향에서는 괜찮은데 저 방향에서 보면 불안정해 보이는 게 싫어.”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상태가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마음에 안 드는 상태로 두긴 싫어.”
“…….”
나는 단 두 마디로 설득당했다.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잘못된 일도 아니니 아내의 마음이 편해지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아내의 내면이 안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안정을 찾으려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다. 더 많은 대화를 통해 탐구해야 할 주제다. 한편으로는 더 깨끗하고 신식인, 시쳇말로 쌈박한 살림을 구비하면 되는데 그걸 하지 못해서 그런 건가 싶어서 미안한 마음도 든다. 아내는 비싸고 좋은 물건을 사려는 게 아니고 주어진 조건 내에서 최적을 찾아가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내의 마음이 어떤지 잘 이해되지는 않는다. 비유하자면 내가 그날 기분에 꼭 맞는 음악이 뭔지 몰라서 이 CD 저 CD 넣었다 뺐다 하는 것 같은 느낌인 걸까? 내 기분과 백 퍼센트 일치하는 음악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비슷한 느낌의 음악을 찾아 CD장 앞에 한참을 서 있는, 그러다 마침내 어떤 선율이 흘러나올 때, 이거야! 싶어 의자에 앉게 되는, 그런 순간을 아내는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내의 배치에 대한 집착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진취적인 노력으로 보인다. 백 퍼센트 마음에 들 수 없다고 해서 그냥 적당히 포기하고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남에게, 심지어 남편에게도 부탁하지 않고 스스로 무거운 가구를 옮긴다. 주체적이고 자립적이다. 테이블과 의자의 위치에 대해 불평하면 아내는 미안해한다. 나는 사실 테이블과 의자 따위 어디에 있든 별로 상관이 없어서 아내가 미안해하면 마음이 풀린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해서 백 퍼센트는 아니어도 최대한 흡족한 상태를 찾아보도록 응원하고 싶어 진다. 완벽하게 마음에 꼭 드는 음악은 없어도 기분을 풀어주는 분위기의 음악은 잘 찾으면 있다. 나의 기분을 알고 좋은 음악을 추천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듯이 아내가 가구를 옮길 때 짜증 내지 않고 손을 보태주면 아내에게 힘이 될까? 그렇다면 쉬운 일이다. 나는 오늘도 아내가 테이블을 옮길 때 같이 들어주었다.
그렇지만 나도 이 집에 같이 사는 사람인데 한 마디 정도는 할 권리가 있지 않나? 괜한 오기가 발동한다.
“이제 집 좀 가만히 둬 줄래?”
아내는 배시시 웃고는 화분에 물 주러 가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