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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근 Aug 30. 2024

네 번째 생각 정리

표류일지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아 저 아래로 가라앉았다. 항상 기대를 너무 많이 하고 태평하게 있는 게 나의 단점 중 하나인 거 같다. 꽤 좋은 기류라고 생각했다. 좋은 기류에 좋은 흐름, 배는 잘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깊은 바닷속 존재가 덮쳐올 줄은 몰랐다. 아니 전혀 생각 못했다. 이번 항해에는 그런 일이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항상 이런 점이 문제다. 좋은 일이나 좋은 현상이 나타나면 그 뒤에 연달아서 좋은 상황이 펼쳐질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대체로 좋은 것들이 보이면 그 뒤에도 좋은 것들이 오기 마련이다. 어제까지 건강했던 사람이 다음날 급격하게 노쇠하기는 힘든 법이며, 계속해서 성과를 내던 회사가 다음 날 갑자기 망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나타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것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귀인이 있다.


 그 귀인은 사실 눈에 보이는데 후광에 가려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건강했던 사람이 다음날 급격하게 노쇠할 수 도 있다. 겉으로는 건강해 보였지만 그동안의 식습관에 문제가 있었거나 적신호가 보였는데 무시했을 수 도 있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회사의 매출은 계속해서 오르지만 복지에 신경 쓰지 않고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주지 않아 내부적으로는 곪고 있던 것일 수 도 있다. 내부적인 악신호와 그에 대한 귀인은 존재하지만 좋은 것만 보다 보니까 그런 것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번 항해도 그런 식인 거다. 좋은 기류와 좋은 흐름, 좋은 날씨는 항해하기에 좋다. 하지만 그날따라 바다에 물고기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물고기들은 이미 알았다. 바다 밑에 있는 존재가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배는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 보았다. 유독 잔잔한 바다, 그것에 기뻐했고 배가 도착할 것을 기정사실화했다. 하지만 배는 가라앉았다.


 사건을 직면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키를 잡고 돌려도, 이미 키는 배와 분리되어 허공을 돌고 있을 뿐이다. 돛은 부러져 바다에 적셔져있고 상황파악이 끝났을 즈음에는 이미 바다 깊숙히에 가라앉고 있는 중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내가 어떤 것을 놓쳤을까. 헤엄쳐 올라온다는 판단을 하기 보다 실수에 대해 곱씹으며 점점 더 밑으로 가라앉고 있다. 처음에는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세상을 저주하고, 버티지 못하는 배를 저주하다가, 결국에는 모든 것을 결정하고 수행한 스스로를 저주하며 약간의 거품만을 위로 보내며 어둠 속으로 향한다.





 내가 육지로 떠오를 수 있을까. 지금 당장 헤엄쳐 올라간다면 아마 나는 육지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밑으로 끌려간 게 아니라 배가 반파된 것이다. 내 몸은 괜찮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으니 나는 다시 올라올 것이다. 우리는 출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섬들은 많기에 조금만 정신 차리면 육지에는 금방 도착할 거다. 하지만 다음 항해에 갈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저 바닷속 존재가 두렵다. 내가 파악하지 못하는 존재가 너무나도 두렵다.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겠지만, 저 깊은 곳에서 언제 올라올지 모를 존재가 두려워서 나서지 못하겠다.


 아무래도 이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억은 희석되고 나는 다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완벽히 희석되는 게 아닌 한 계속해서 나를 괴롭힐 거다. 끝맛이 괴로울 거 같다. 그날 맛 본 바닷물의 맛이 계속 혀에 남아서 짭짤하면서 텁텁한 그런 맛을 남길 거 같다. 이 마저도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즐거운 시간이 되지는 않을 거 같다. 매 순간이 즐거울 수는 없지만 이건 조금 괴로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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