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해방전선

by 중앙동 물방개

한 중년 회원이 샤워하는데 발을 동동 구른다. 수영복 입을 때 가슴에 넣는 실리콘 패드를 안 가져왔다고 한다. 다른 회원들이 별로 티가 나지 않으니 괜찮다고 달래서 수영하러 가셨다.

수영하고 나면 실리콘 패드 자국이 가슴에 남아있어서 이걸 꼭 차야하나 고민하며 그날 수영장을 둘러봤다. 남성 회원들은 가슴을 가리고 말고를 떠나 모두 상의를 탈의한다. 여성은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나서 실리콘 패드까지 찬다. 유두는 남성도 있다! - 가끔 나보다 더 가슴이 발달한 남성도 있고 심지어 그런 분도 거침없이 상의를 탈의하는데 감히(?) 내가 실리콘 패드를 차야 하는가 본질적인 의문이 든다 - 이 실리콘 패드가 유두 가리개 말고 다른 어떤 기능이 있는지 아시면 알려달라.

실리콘 패드 따위 차지 않아도 아무 문제없다는 걸 알지만, 여전히 머뭇거린다. 그저 남들 다하니까 튀지 않는 게 괜찮은 거 아닌가 하고. 만약 많은 여성 회원이 그냥 실리콘 패드를 차지 않는다면, 그럼 실리콘 패드를 사지 않아도 되고(돈 절약!) 안 가져왔다고 풀 죽을 필요도 없고(가벼운 수영가방!), 수영 후에 자국도 남지 않고 모두에게 좋은 게 아닐는지 오늘도 샤워하며 생각이 많아진다.


자유수영 하던 날이었다. 시작점에서 남성이 서 있다. 열심히 자유형을 하며 시작점으로 돌아오다가 나는 물속에서 매생이인지 해초처럼 무언가 물살에 맞춰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의 존재감은 커졌다. 오 마이 갓. 중요부위의 털을 관리할 의향은 없으나 매생이가 수영장 구경을 하겠다고 집단으로 삐져나올 정도로 남성호르몬이 많다면 삼각이 아닌 사각이나 3부를 입어도 되지 않나요.

여성은 대개 겨드랑이, 다리를 제모하고 샤워실을 벗어나기 전까지 음모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 쓰는데 왜 남성은 이토록 당당한가. 다같이 제모에 힘쓰자는 말이 아니다. 겨드랑이나 다리털은 제모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만 여성이 신경 쓰는 만큼 남성도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털털한 사람이라면 3부나 5부를 입길 바란다. 수질이 좋은 수영장을 만들어 가는데 동참하시죠.

한편, 털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아련하다. 머리카락이나 속눈썹 같은 털은 없으면 어떻게든 돈을 써서라도 만드는 반면, 몸을 보호하려고 자라나는 털들은 아름답지 못하다는 편견 때문에 어떻게든 지지고 뽑고 잘라서 없애는 운명에 처한다. 이 모든 게 인간이 만들어 낸 미적 기준 외모 코르셋 때문이다.


탈의실과 샤워실은 다양한 몸을 마주하는 공간이다. 자유수영 날에는 어린이부터 80대 어르신까지 볼 수 있다. 가슴과 배에 선명하게 드러난 수술 흔적, 타투가 있는 몸, 수영복을 벗었는데도 입은 것 같은 태닝된 몸, 신산한 삶을 고스란히 통과한 몸이 곳곳에 있다. 수영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의 나는 내 몸을 유심히 보지 않았다. 샤워 후 빠르게 물기를 닦아내고 속옷을 챙겨 입기까지 20초가 유일하게 내 몸을 보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수영을 하며 거울 앞에 섰을 때 어느 날 나만 알 수 있는 몸의 변화를 발견했다. 민둥맨둥 특색 없는 몸의 어깨와 팔 부근에 근육이 붙은 것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바디프로필을 찍기 위해 만든 몸이 아닌 1년 이상 꾸준히 수영하니 나타난 결과다. 나는 근육을 명왕성 같은 존재로 여겨왔다. 그곳에 있다는 건 알지만 어쨌든 육안으로 보기는 힘든. 지난 여름엔 생전 안 입던 민소매 옷도 입는다. 비단 근육이 생겨서만은 아니고 수영복이라는 (어느정도 노출있는) 옷을 계속 입으며 사람과 대면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내 몸을 긍정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족. 위 글을 쓰고 오늘 실리콘 패드를 뺀 뒤 수영해 보았다. 예상했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타인의 몸에 별로 관심없다. 여성 수영인 여러분 가슴을 해방시켜 봅시다. 자꾸만 뭘 사라고 부추기는 시장 자유주의에서 실리콘 패드부터 먼저 타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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