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수영하기
지금 리스본 시내의 한 수영장에 와 있다. 여행지에서의 수영은 간단해보여도 실은 여러 조건을 충족해야 가능하다. 먼저 수영할 수 있는 몸 상태(월경이나 아물지 않은 상처가 없는 상태, 감기 등)와 여유로운 여행 일정, 가까운 곳에 갈만한 수영장이 ‘운영’되고 있어야 한다. 다행히 호텔 근처에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수영장이 있었다. 다만 운영하는지는 미지수.
지도 어플만 믿고 갔다가 ‘운영 중’이라는 문구와 굳게 닫힌 문을 망연히 번갈아 바라본 적이 있기에 가기 전에 누가 확인해주면 좋으련만. 아, 나에겐 호텔 스태프가 있었지. 포르투갈어를 잘하는(당연하다. 포르투갈인 이니까) 그에게 수영장에 전활 부탁했고 옆에서 통화 대기음을 한동안 듣다가 대화가 시작됐다. 포르투갈어를 완벽히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 내용이 대충 긍정적이라는 건 눈치껏 알 수 있었다. obrigada!
포르투갈어로 자유수영은 Picina livre. 한글로 ‘자유수영’ 이란 단어를 볼 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리브레, 하고 발음하니 혁명이 연상되어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카운터 직원에게 수영하러 왔다고 하니 자유수영인지 배우러 온 건지 묻는다. 통상적으로 묻는 거겠지만 편견 없는 분이군! 외국인도 배울 수 있나 싶어 조금 신기했다. 두 질문에 대답하고 3유로를 낸 뒤 비로소 주어진 하얀 종이. 포르투갈어로 적혀 있는데 여권번호와 오늘 날짜를 적고 서명하면 된다. 거기에 여권 확인까지 이어졌다. 외국 여행을 다니며 여러 수영장을 다녀봤지만 서류 작성에 여권제출은 처음이다.
모든 일에 ‘신속정확’을 좌우명으로 내 건 나라에서 온 국민은 수영장 입장 하나에 30분 넘게 걸리는 게 의아하나 어쨌든 수영할 수 있다고 하니 게시판에 붙은 안내문을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수영 뿐 아니라 자전거, 러닝 등 다양한 운동 크루를 모집하고 있다. 건강한 지역사회의 조건은 이렇게 운동과 여러 취미를 부담 없이 배울 수 있는 센터의 존재 여부 아닐는지. 내게 이런 걸 운영할 자본과 권력이 생긴다면 시나 구에서 운영하는 센터를 만들고 경력이 단절된 여성과 은퇴한 스포츠인을 선생님으로 고용하고 싶다. 수영장 앞엔 작은 매점을 만들어 육개장 사발면을 비치해야지.
드디어 입장 허가가 떨어졌다. 수영모는 필수, 수경은 선택! 당신의 눈이 충혈되도 상관없으나 머리카락이 둥둥 떠다니는 건 절대 안된다는 말로 들린다. 수영장에 들어서는데 강습이 끝나고 나오는 어린이들과 마주쳤다. 절차가 오래 걸린 게 아니라 어린이들 수업 종료 시간에 맞춰서 나를 기다리게 한 것 같다. 탈의실은 샤워실과 붙어있다. 안내데스크에서 안내를 받고 탈의실, 샤워실, 수영장으로 이어지는 한국 수영장의 일반적인 동선과 달리 수영장으로 들어간 후 샤워실이자 탈의실로 들어가는 구조다. 라이프 가드에게 사물함이 어디 있냐고 물으니 로커는 없고 귀중품은 본인에게 맡기라고 한다. 근데 어차피 지금 시간엔 당신들밖에 없으니 그냥 곁에 두고 해도 된다고 했다.
1.3m 정도의 깊이에 25미터 레인이 잘 갖춰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영장엔 나와 반려인 뿐이어서 레인을 각각 써도 무방하다. 하긴 월요일 오후 한 시에 수영하러 올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평일 낮의 자유수영이야 말로 여행자의 특권이다. 강습을 많이 하는지 여러 도구가 있는데 누군가 벗어둔 패들이 있어서 시험 삼아 끼고 연습해봤다. 뭔가 첨엔 이상했지만 차고 연습하다가 빼고 하니 손이 가벼워져서 마치 발목에 모래주머니 끼고 달리기 훈련하는 선수가 된 것 같았다.
수영을 다하고 탈의실에 갔더니 두 명이 있다. 한 여성이 손바닥만한 작은 사물함에 뭔가를 넣었고 그가 떠나간 자리에 작은 자물쇠가 걸려있다. 아, 저 작은 락커를 저렇게 이용하는 것이군!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슬리퍼를 신었다. 역시 처음 온 사람들은 아니다. 샤워실에서 대부분 물만 뿌리는 수준이라 열심히 샤워하는 건 나뿐이었다. 할머니가 bom dia 하면서 나가셨다. 딱히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그저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인사하고 나가는 게 좋아 나도 boa tarde로 화답했다.
리스본에서 피할 수 없는 게 있다면 죽음, 세금, 여행자가 아닐까. 나도 여행자지만 무심결에 ‘와, 여행자 진짜 많다’를 말하게 된다. 리스본 사람들도 한번쯤 여행자가 없어 적적하던 도시를 조금은 그리워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 면에서 수영장이 있는 지역은 나의 숙소에서 지하철로 세 정류장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투어리스트 스팟을 벗어나 비로소 한적한 리스본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