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만으론 안되는 일

여행지에서 수영하기

by 중앙동 물방개

같은 레인의 회원들에게 여행 때문에 추석 지나고 올 예정이라고 일러두었다. 여행은 좋지만 강습을 듣지 못해 아쉽다. 내가 이 자리까지 ktx 타고 온 게 아닌데 어떻게 끌어올린 실력인데 퇴보할 순 없어! 하는 - 사실 퇴보할만 한 실력은 없습니다만 - 류의 조바심이 든다. 나름의 보완책으로 수영장 있는 호텔을 예약하거나 여행지에서 수영장 가는 계획을 세웠다.


첫 여행지는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이 호텔엔 실외 수영장이 있다. 출국 전 건강앱은 '지금으로부터 n일 후 월경이 시작될 것'이란 무책임한 말을 내뱉었지만, 아직은 소강상태다. 10월 초의 카사블랑카는 서울과 마찬가지로 기온이 24도를 웃돌며 날이 온화하다. 오후 두시의 한적한 수영장에 발을 담그며 말했다 . “아, 겨울에 맨몸으로 폭포에서 수련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몸은 그대로 얼어 붙었고 이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문 밖을 나서기만 해도 녹아내렸던 한국의 여름을 겪은 이라면 25도는 두 팔 벌려 환영할 기온이지만, 적절한 옷을 입고 거리 위를 활보할 때라야 좋다고 할 수 있다. 아직 해가 들지 않아 충분히 데워지지 않은 그늘의 야외 수영장은 젖은 수영복 한 벌이 전부라서 한기가 더욱 강렬하게 느껴질 뿐이다. 깊은 산 속 물 아래에서 득도하는 자의 마음가짐과 동네 회원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얕은 수영장을 날렵하게 오가던 아시아인은 결국 30분 만에 오들오들 떨며 물 밖을 나왔다. 가만히 지켜보니 수영장 위로 해가 자리잡아 가장 따뜻해지는 오후 3시경 한낮의 더위를 피하기 위해 수영장 근처로 투숙객들이 모이는데 모두 수영장이 주는 분위기만 즐길 뿐 수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것이 모로코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영이었다.


포르투갈 포르투에서는 월경이 시작됐고 다음 여행지는 코임브라Coimbra인데 월경이 끝나갈 무렵이라 수영을 할 수 있었다. 코임브라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땅을 보러 온 영주처럼 가장 먼저 수영장을 둘러 보았다. 시원한 풍광을 자아내는 야외 수영장과 온수로 적정 온도가 유지되는 실내 수영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로코에서 제대로 하지 못한 수영을 이제는 즐길 요령으로 수영복도 꺼내두었다. 사실 나는 모로코에서부터 동행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여행이 진행될수록 존재감이 커지고 있었으니 이미 커질대로 커져버린 친구가 그날밤 폭발했다. 바로 오른쪽 귀 뒤의 피지낭종이 푸악 소리를 내며 터진 것이다.


살면서 내 몸에서 한 번에 그렇게 많은 고름을 본 건 처음이었다. 휴가를 간답시고 출국 며칠 전부터 휴가 기간에 처리해야 할 업무로 야근을 했고 행사로 아침 6시에 일어나는 등 수면부족을 겪고 있었다. 출국 당일 아침 7시에 일어나 목적지인 리스본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17시간의 이동과 비행. 그런 몸으로 쉬는 일 없이 하루에 2만보씩 돌아다니고 있으니 피곤함의 리트머스인 귀 염증이 나타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자정을 앞둔 시각, 호텔 직원이 걱정하는 눈빛으로 응급약 키트를 들고왔다. 염증과 함께 상당한 피를 함께 본 탓에 직관적으로 수영하면 안된다는 걸 알았다. 하루만 지나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들면 수영장 물이 2차 감염을 일으킬 수 있다는 AI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 당장 수영하는 것보다 무리없이 회복해서 한국에서 수영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아쉬운 마음을 참아내자. 이로서 코임브라 수영장도 휴대폰 앨범에 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여행 중 수영은 생각보다 많은 변수가 있다. 월경, 감기, 염증 같은 몸 상태도 고려해야 하면서 실외 수영장은 수영할 수 있는 날씨와 기온인지, 어떤 곳은 수영할 수 있다고 해놓았지만 수질이 제대로 관리되어 있지 않거나 바선생을 마주할 수도 있고 수영장이 공사 중인 경우도 있다. 그러니 여행지에서 수영했다면 그 지역과 수영 궁합이 상당히 잘 맞은 것이다.


결국 이번 여행은 수영을 못하고 돌아가게 되는 걸까. 캐리어 한 켠을 차지한 수영가방이 어쩐지 측은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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