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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핑크 Mar 07. 2019

난 그냥 엄마가 되기 싫었어

다른 뜻은 없어요

오랜 프리랜서 생활을 청산하고 좀 규칙적인 생활(&규칙적인 월급)로 돌아가고 싶어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원래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프리랜서로 3년 간 일하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 7일 하루 종일 방 안에서 컴퓨터 모니터만 바라보는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정말 지긋지긋했던 회사생활이 아주 아주 조금은 그리워졌던 것이다. 예전에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일이지만 그때보다 조금은 내가 어른스럽고 성숙해지지 않았을까. 그때 날 좌절시켰던 수많은 난관을 이제 조금은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진 않을까. 컴퓨터 속 사이버 세상이 아닌 현실세계에서 아직 내가 사회의 톱니바퀴라는 실감을 얻고 싶었다.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이력서를 제출하자 인사담당자에서 바로 연락이 왔고 면접 날짜가 잡혔다. 자기소개와 과거 경력, 사는 곳, 지원 동기... 그리고 역시 그 질문 차례다. "아이 있으세요?" 

나: 아뇨, 없습니다
면접관: 아, 아직 미혼이세요?
나: 기혼인데 아이는 없어요.
면접관: 그럼 근무하다가 아이가 생기실 수도 있겠네요? 저희 업무 특성상 담당자가 자주 바뀌면 곤란해서 장기근속하셔야 하는데...
나: 아뇨, 전 딩크족이라서 앞으로도 아이 계획이 없습니다.  


그제서야 책상 위의 이력서만 뚫어지게 보던 나이 지긋한 면접관이 고개를 들고 내 얼굴을 바라봤다.

"딩크족? 그게 뭐죠?"


딩크족이란 더블 인컴노 키즈의 약자로 결혼은 했지만 의도적으로 아이를 두지 않는.....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받아 머리에 입력되어 있는 답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면접관: 아, 그런 것도 있군요. 처음 봤어요. 정말 신기하네요. 그러면 우리 회사가 야근이 좀 있는 편인데...
나: 전 회사에서도 야근을 많이 했어요, 필요하다면 야근 가능합니다.
면접관: 아니 이렇게 서구적인 마인드를 가지신 분이 진짜로 별 불만없이 야근 할 수 있어요?


응? 내가 서구적인 마인드를 가졌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면접관은 계속 말했다.

"또 대부분 회사가 그렇겠지만 우리 회사도 좀 보수적인 집단이라 연핑크씨처럼 개인적이고 자유분방하신 분이 적응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되네요"


응? 내가 개인적이고 자유분방한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던가? 내가 딩크족이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난 서구적이고 개인적이며 자유분방해서 회사 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된 것인가.


딩크족은 내 개인적인 사생활일 뿐 직업과 직장에 대한 자세는 별개니 구분해서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분명히 말했지만 면접관은 남은 시간 내내 나를 서구적인 사람, 개인적인 사람, 전통문화를 정면으로 배척하는 사람 등등으로 규정했다. 우리 회사에서 적응하려면 많이 참고 양보하며 맞춰야 한다는 말도 여러 번 덧붙였다. 과거 회사생활할 때도 너무 참고 양보만 하다가 온갖 일을 나 혼자 다 떠안아서 힘들었던 것인데...


그래도 어찌어찌 채용이 됐다는 연락이 왔지만 고민 끝에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면접관이 나와 함께 일할 상사였는데 입사도 하기 전에 날 이미 선입견의 틀 속에 가둬놓고 시작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냥 일만 잘하는 것도 힘든데 내게 쏟아지는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또 스스로 무리할 것 같았다.


다행히 또 지원서를 넣었던 다른 곳에서 연락이 왔고 두 번째 면접을 보러 갔다. 마찬가지로  자기소개와 과거 경력, 사는 곳, 지원 동기... 그리고 또, "아이 있으세요?" 


내가 이번에도 딩크족이라 아이가 없다고 하자 나이 지긋한 여성 면접관의 표정이 급격이 어두워졌다.

" 경력이나 다른 조건은 좋은데... 여기는 모성보호를 적극 지지하는 단체라서 저희랑 잘 맞을지 좀 걱정이네요. 엄마와 아이 관련된 사업 내용도 있는데 아이를 그렇게 싫어하시면..."


음... 내가 언제 아이를 싫어한다고 말했던가?

모성 보호는 나도 적극 지지하고 아이를 내가 낳을 계획은 없지만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지만 면접관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을 끝내 안 믿은 건지 아니면 더 적합한 다른 사람이 있었던 건지 결국 면접에서 탈락했다.


나는 면접에서 딩크족이라서 아이가 없다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그래서 내 인생에서 일과 직업이 갖는 의미가 크니 열심히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회사 입장에선 이런 자세의 직원, 나름 괜찮지 않나? 라고 내 기준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보다 내가 가진 남들과 다른 부분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 같았다.


남편은 책을 읽고 나는 그림을 그리는 각자의 취미 시간.


그럼 난 왜 남들과 조금 달라졌을까.


난 그냥 엄마가 되기 싫었다.

다른 뜻은 없어요.

부부 사이에 문제(정서적, 육체적)가 있어서도 아니고 불합리한 전통과 부조리한 사회에 맞서기 위해서도 아니고 아이가 싫어서도 아니고 대단한 야망과 관철하고 싶은 뚜렷한 신념이 있어서도 아니다. 유난히 힘든 하루, 피곤한 몸을 이끌고 탄 지하철에서 겨우 자리를 찾아 앉았을 때, 노인과 장년의 애매한 경계에 계신 어르신들이 내 앞에 서면 눈을 스스로 감고 자는 척을 할 지라도 임산부나 아이를 안은 엄마가 타면 꼭 양보를 하니 모성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은 것 같다.(면접관의 생각과 달리)


내가 여러 사람 앞에 서는 것이 유난히 두려워서 교사가 되지 않은 것처럼, 낯선 사람들을 설득할 재주가 없는 극 내향인이라 영업사원이 되지 않은 것처럼, 심각한 저질 체력이라 운동선수가 되지 않은 것처럼 내 성향과 능력을 고려했을 때 엄마라는 역할을 갖고 싶지 않았다. 위에 나열한 직업을 선택할 때의 기준보단 좀 더 복합적인 이유로 결정을 내렸지만 비슷한 생각의 알고리즘을 통해 도출된 결과다.


우리나라가 엄청난 복지국가가 되어 아이 키우기 좋은 유토피아가 돼도, 미세먼지가 해결돼서 뉴질랜드처럼 깨끗한 공기를 갖게 돼도, 설령 출산하면 1억 원을 준다고 해도 난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


그냥 엄마가 되길 원하지 않는 아주 사적인 내 마음. 이 마음을 설득하거나 혹은 보상으로 상쇄할 방법은 내게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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