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평화로운 일상의 위험
넷플릭스를 좋아하는 언니가 너무너무 재밌다며 드라마를 한편 추천해줬다. 나와 취향이 비슷해서 추리 수사물을 좋아하는 언니. 나보다 훨씬 까다롭고 '재미'의 기준이 엄격한 언니가 추천해주는 콘텐츠는 늘 믿을 수 있다. 그런 언니가 주말 밤 아이를 재워놓고 형부와 둘이서 밤을 꼬박 새우며 정주행 한 드라마라니 얼마나 재밌을까.
남편과 둘이서 부푼 마음을 안고 언니의 추천작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음... 이상했다. 분명 언니는 무척 재미나서 아침이 오는 줄도 모르고 빠져들었다고 했는데...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조금 시시했다. 약간 지루하기도 했다. 결국 그만 보기로 했다.
뭐가 문제일까. 그 사이 언니와 취향이 달라진 걸까? 죽이 잘 맞는 자매로 최소 20년 이상 확고한 취향을 공유한 사이인데...
그러다 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안 그래도 박진감 넘치는 드라마인데 건넌방에 재워놓은 아이가 깰까 두려운 마음에 스릴이 2배였다고 한다. 한밤중에 자다 깨서 드라마 감상을 방해할 아이가 없는 나의 스릴은 언니의 1/2 밖에 안 되니 그만큼 재미도 덜했나 보다.
생각해보니 언니는 넷플릭스와 추리수사물을 좋아하지만 나처럼 매주 주말, 또는 퇴근 후 보고 싶다고 언제든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루 종일 아이 위주의 생활을 하느라 바빠서 혼자만의, 또는 형부와 둘만의 시간을 좀처럼 가질 수 없는 언니는 조용히 커피 한잔 마시는 시간도 무척 소중하다고 했다. 그런 언니가 모처럼 형부와 둘이서 드라마에 푹 빠지는 시간을 가졌으니 뭐든 재밌었을 수밖에.
지금 우린 출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에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조용하고 안정적인 일상과 우리 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소중해서 딩크를 선택했다. 현재는 정말 행복하고 만족스럽지만 어느 날 너무 평화롭다 못해 심심해지면 어떡하지. 지금 우리 부부에겐 집에서 여유롭게 간식을 먹으며 넷플릭스를 보는 게 취미이자 가장 큰 행복인데. 30년 동안 매주 주말 집에서 넷플릭스를 본다면 그때도 한결같이 신이 날까? 평화와 안정을 넘어 지루하진 않을까. 그러다가 권태기라도 찾아오면...
문득 불안해졌다. 안 그래도 내향적인 성격에 변화를 싫어하는 남편과 나. 이러다 우리 집 지박령이 될 것 같았다. 주말에 멀리 외출한 게 언제였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나는 급속도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 불안을 해소할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러다 예전에 본 한 연구 결과가 떠올랐다. 새로운 일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부부는 설레는 감정이 오래 지속되고 사이도 더 좋다는 내용이었다. 그래, 우리도 그 설레는 감정 한번 오래오래 느껴보자. 그렇게 남편과 한 달에 1개씩 한 번도 안 해본 새로운 경험을 하기로 약속했다.
첫 번째 경험은 카자흐스탄 미술 감상. 미술관은 나 혼자 종종 가는 편이지만 카자흐스탄 미술은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다. 아시안컵 축구 경기 때 동서양의 외모가 다양하게 조화된 키르기스스탄 팀 선수들을 보고 그 나라와 문화에 호기심을 느낀 적이 있다. 인접 국가인 카자흐스탄 미술을 통해 궁금증을 조금은 충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둘 사이에 적당히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 좋은 기회였다.
역시 그랬다. 정말 새로웠다. 소박하고 서민적이면서 동서양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룬 카자흐스탄의 미술품에 완전히 매료됐다. 미술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편도 신기해했고 대화의 주제도 새로운 방향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미술관을 나와 근처 만두와 쫄면으로 유명한 맛집에 들렀다. 우리 부부는 평소 북적이는 곳을 좋아하지 않아 맛집 탐방은 절대 하지 않는다. 핫플레이스는 최대한 멀리한다. 하지만 그날은 왠지 새로운 기분에 들떠 안 하던 짓 하나쯤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낯선 나라의 미술과 생전 안 하던 맛집 방문. 확실히 새로운 기분이었다. 안정적인 것도 좋았지만 다소 정체돼있던 공기를 신선하게 환기시킨 느낌이었다.
100세 시대라고 가정했을 때 앞으로 아마 60년을 함께할 우리. 아마 남들보다 조금 더 조용하고 어쩌면 조금 더 심심한 인생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너무 소중한 안정적이고 평범한 일상. 그 소중함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늘 옆에 있는 서로의 소중함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함을 느낀다. 한 달에 한 가지씩 새로운 경험을 한다면 앞으로 우린 얼마나 많은 일을 함께 하게 될까. 그렇게 쌓인 추억과 이야깃거리가 우리 둘을 더 단단히 이어주길.
당장 다음 달엔 또 뭘 할까. 고민 좀 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