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의 행방

by NJ

산에서 주고받는 인사라야 대부분 엇비슷하지만, 작년 문수봉에서 마주친 한 여인의 인사는 특별했다. ‘어휴, 아이젠도 없이 이 눈길을.’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산에 오르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세심하고 따뜻한 인사다. 산에서 내려와 시장에서 국밥 한 그릇을 비울 때까지 내게 전해진 그 마음이 식지 않았다.


작년 가을부터는 뜬금없이 ‘인수봉’이 자주 등장한다. ‘인수봉에서 오시는 길인가 봐요?’ 인수봉에서 오는 길은 아니었으나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인사가 아니다. 처음 몇 번은 대충 얼버무렸으나, 언젠가는 어떤 사내가 아예 길을 물어본다. ‘인수봉 가는 길이 이쪽인가요?’ 그가 내게 말을 건넨 곳은 공교롭게 <인수봉 1.8km> 이정표가 서 있던 곳, 그게 질문이었는지 인사였는지 지금도 아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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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을 알고 지냈어도 제대로 된 인사 한번 나눈 적 없는 경우도 있다. 인사동 단골 카페 <볼가> 사장이 그랬다. 늘 환하게 웃으며 가벼운 목례만을 내게 건넸는데 그게 그 인사법의 핵심이다. 내 은밀한 연애사의 변천과 흥망성쇠 대부분을 목격했으니 피차 민망할 수도 있을 터.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그 적당한 거리, 그에 걸맞은 눈인사가 부담 없고 좋았다. 취중에 놓고 간 만년필을 찾으러 갔을 때도 서랍에서 만년필을 꺼내 건네며 환한 미소만을 지어 보였을 뿐이다.


반면, 총각 시절 남부 스페인에서 경험한 그들의 인사법은 그곳 날씨만큼이나 뜨거웠다. 서울 촌놈이 언제 ‘그토록 친밀한’ 인사법을 들어보기나 했겠는가. 현지 도착 당일, 공항에서 한 처자가 나타나 자신을 통역이라 소개하더니 불쑥 내 어깨를 잡고 양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는 것이 아닌가. 사전 설명이나 양해 같은 건 없었다. ‘뭐 이렇게 에로틱한 인사가 다 있어?’ 내심 놀라고 당황하고 불쾌한.....건 아니었고 딱 내 스타일이었다.


이 새로운 인사법에 잔뜩 호기심이 생겼고 차츰 시간이 지나자, 꼼수까지 부리는 여유도 생겼다. 인사법에 서투른 척 고개를 돌려 내 입술로 처자들의 입술을 탐하는 도발까지 시도한 것이다. 불행히도 사술은 오래가지 못해 들통났고, 나는 기피인물로 찍혔다. 그래도 미련이 남은 나는 내 스타일의 인사법에 ‘세기말식 베시토’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둘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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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남부 아라비아인들의 인사법도 흥미롭다. 남자끼리는 코끝을 섬세하게 마주치고 남녀 간에는 손가락 끝을 스치듯 건드리는 방식인데, 페르시아 시인 루미를 연상케 하는 제법 몽환적인 분위기다. 지금도 이 장면을 생각하면 불현듯 무슬림 복장 잘라비야를 입은 채 코란의 한 구절을 낭랑하게 독송하고 싶어진다. 하도 멋지고 우아한 인사법이라 아내와 같이 몇 번 연습 삼아 흉내 낸 적도 있다.


그밖에 기억나는 ‘인사’가 서너 개 더 있다. ‘오랜 세월 고마웠습니다. 이발소 주인 백’. 문을 닫게 된 어느 이발소 주인의 폐업 인사는 다소 마음을 아리게 한다. 그의 말처럼 오랜 세월이었을 것이다. 아니, 거의 한 평생이었을 수도 있다. 저 짧은 작별 인사에 그가 지나쳐 온 세월에 대한 상념과 회한, 아쉬움까지 엷게 배어있다. 마침표처럼 느껴지는 아뢸 백(白) 자가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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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 주인이야 글이라도 남겼지만, 불가에서 전해지는 한 인사법은 ‘떠날 때는 말없이’ 스타일이다. 사정이 있어 절에서 며칠 신세 지고 떠날 때, 묵었던 요사채 앞마당을 깨끗이 비질하는 것이 인사다. 진언을 나누고 성불을 기원하며 서로 합장하는 일반적인 불교식 인사마저 생략한 묵언 형식이다. 자기가 남긴 흔적을 스스로 지우고자 하는 것이겠지만 비질의 깨끗한 흔적은 남는다. 비질 자국이 남아있는 마당은 자국조차 없는 것보다 더 깨끗하다.


끝으로 소개하는 황현산 선생의 혼밥 에피소드는 영락없는 한 폭의 그림이다. 선생이 대학생 때 속초에 혼자 여행을 갔던 모양이다.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탁자가 하나뿐인 라면집에 갔다. 맞은 편 40대 남자가 먼저 나온 라면을 먹지 않고 있다가 1분 후쯤 드디어 ‘먼저 먹겠습니다’ 했단다. 그가 나중에 가볍게 탄식한다. ‘아, 내가 먼저 드시라고 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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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른들은 사라지고 노인들만 남은 세상이다. 어른들이 사라지자 공교롭게 큰절도, ‘기체후 일향 만강’ 따위의 ‘번거로운’ 인사치레도 대부분 사라졌다. 새삼스레 세월이 참 변화무쌍하다. 누구는 앞서가는 자이고 누구는 뒤따르는 자일 뿐 모두는 결국 누군가의 추억으로만 남는다. 최근에 자주 받는 인사 역시 안타깝게도 마지막 인사, 부고 인사다.


사물에 이름을 붙여주고 불러주는 게 시인의 일이라면,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 즉, 인사 人事는 문자 그대로 사람의 일이다. 모든 인사는 결국 살아남아 자신에게 향한다고 했던가. 얼마 남지 않은 겨울에게, 다가오는 새봄에게, 늙어가는 나에게, 다정한 당신에게도 인사를 건넨다.

다들..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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