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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Jan 13. 2021

왜 야단맞아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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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2월 17일의 산책 -


인터넷으로 그림을 검색하다가 로저 뮬Roger Mühl이라는 화가를 알게 됐다. 그의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그의 이름으로 된 폴더를 만든 후 그림을 잔뜩 수집했다. 오전 내내 그림을 보는 일에 정신이 팔렸다. 그러다 리베카 솔릿의 『걷기의 인문학』을 몇 장 읽고서야 밖에 나가 걸어야겠다는 충동이 들었다. 모니터 속의 풍경에서 빠져나와 진짜 풍경으로 들어갔다. 바깥 하늘은 로저 뮬의 화풍보다 더 매끈했다. 어떠한 붓 터치도 없이.




-2020년 12월 22일의 산책 -


메리 파이퍼의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지혜로운 활동가는 주기적으로 세상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지는 것이 세상을 바꿔나가는 과정의 일부라는 걸 안다. 찰스 디킨스는 한 시간 글을 쓰면 한 시간을 걸었다."* 나는 활동가도 등단 작가도 아니지만 활동하는 사람이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찰스 디킨스처럼 한 시간씩 걷거나 매일 걷는 것은 어렵지만 내가 만들 수 있는 시간만큼이라도 걷는다. 나와 세상의 정체停滯를 뚫는다는 기분으로 걷는다.


공기 반 소리 반이 아니라 잔디 반 흙 반인 산책로를 걸었다. 리처드 롱의 작품 같은 길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나 그어진 공원. 사람들이 밟아서 만들어진 길이다. 시간차 플래시 몹으로 완성된 길쭉한 작품들. 나도 이 작품의 공동 작가라는 생각에 쾌감을 느낀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오돌토돌한 흙길의 감촉이 일정한 박자로 전해졌다. 땅이 내 발을 토닥이며 나를 진정시켜주는 것 같았다. 집에만 있다 보니 마음이 피폐해져서 공원에 나온 건데 역시 나오길 잘했다. 프리랜서이자 엄마인 나에게 집은, 오만 가지 일이 휘몰아치는 작은 상자이다. 공원에서는 내가 할 일이 없다. 막힌 벽과 천정도 없다. 산책만 하면 된다.


산책에는 벼락치기라는 문법이 없다. 한 걸음씩 정직하게 쌓아나가는 행위이다. 보행은 삶의 은유다. 삶을 걸어갈 땐 조급해 할 필요도 없고, 조급해 한들 소용도 없다. 욕심부리지 말고 절망하지도 말고 매일 하루치만 걸어가면 된다. 산책하듯.


온통 조용한 것뿐인 길을 걷는데 왼쪽에서 바삭바삭 소리가 났다. 작은 새들이 마른 갈대 속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소리였다. 다리뿐 아니라 날개로도 이동할 수 있는 새. 새는 사람보다 능동적인 육체를 가졌다. 역동적인 육체노동과 거리가 먼 나 같은 도시인들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조그마한 몸뚱이 하나로도 삶을 살아 낼 수 있다는 긍지에 생명이 입혀지면 작은 새가 된다. 무지막지한 가짓수의 도구 없인 살아갈 능력을 분실한 맥시멀리스트 현대인들과, 갈대에 앉는 게 가능할 만큼 단출한 존재이면서도 인간보다 더욱 세상을 활보할 수 있는 저 새는 얼마나 다른가.


간밤에 추웠는지 강이 얼었다. 두꺼운 강의 얼음은 따스한 오전 햇살에 맥을 못 추었다. 널따란 얼음이 촉촉하게 녹으면서 반짝였다. 자연의 변화를 맨눈으로 보고 있다는 게 황홀했다.


이런 풍경을 못 보고 산 시절이 훨씬 많았다. 집 근처에 산책로가 없어서 그랬다. 산책할 시간과 상황을 가지지 못했던 날도 숱하다. 그런 날들을 지나오게 하신 것도, 지금처럼 산책로를 밟게 하심도 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가진 것에 대한 감사를 글로 남기는 것은 두렵다. 내가 가진 것을 소유하지 못한 이에겐 나의 감사가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저는 그런 일을 바라지 않습니다. 저의 감사를 용서해 주세요.





- 2020년 12월 26일의 산책 -


산책로 언덕에 할아버지 한 분이 자전거와 함께 쓰러져있었다. 달려가서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괴로운 표정을 지으셨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셨고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자전거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이라 일단 쓰러진 자전거부터 세웠다. 쏟아진 물건들도 자전거 뒤 바구니에 담았다. 때묻은 마스크가 여러 장, 라이터 한 개, 전단지, 신문.


할아버지는 영 일어나질 못하셨다. 차가운 땅에 엎어져서 몸을 꿈틀거리고 계셨다. 혹시라도 부러진 곳이 있을지 몰라 억지로 일으켜 세워드리는 건 피했다. "괜찮으세요? 구급차 불러드릴까요?" 조심스럽게 물으니 고개를 저으셨다. 자전거 헬멧은 안 쓰셨지만 다행히 머리를 다치지 않으신 것 같았다. 팔을 붙잡고 앉을 수 있게 도와드렸다. 떨어진 모자도 씌워드렸다. 그러는 동안 자전거 탄 남성 두 명이 스쳐 지나갔다. 조금 뒤 어느 중년 남성 바이커가 잠깐 멈추더니 "구급차를 불러야지."라고 말한 후 그도 제 갈 길을 갔다.


네 번째로 다가오던 자전거가 드디어 정차했다. 중년의 여성이셨다. 왜 그러냐고 물으시기에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그분은 할아버지께 다짜고짜 성을 냈다. 다 늙어가지고 왜 자전거를 끌고 나왔냐고 야단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내게 자신과 함께 할아버지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자고 했다. 나는 혹시라도 할아버지께 골절이 있진 않으려나 걱정이 되면서도 그 여성분의 카리스마에 눌려 허둥지둥 할아버지를 일으켰다. 다행히 부러진 곳은 없어 보였다. 길 옆 돌담에 몸을 지지할 수 있게 도와드렸다. 자전거도 할아버지 곁으로 옮겨드렸다. 여성 바이커의 꾸지람은 계속됐다. "젊은 사람들도 여기는 언덕이라 자전거 타기 힘들다고요. 쌩쌩 지나가는 자전거도 많아서 위험한데 늙어가지고 왜 자전거 끌고 나왔어요? 좀 기대서 쉬다가 괜찮아지면 자전거 끌고 살살 집에 가세요. 타지 말고 끌고 가시라고요, 예?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이런 데서 자전거를 왜 타요, 왜." 할아버지는 코끝에 맺힌 땀방울을 덜덜거리는 손으로 닦아내시며 "네에-" 하고 대답하셨다. '늙어가지고'라는 말이 섞인 호통이 역겨워진 나는 할아버지께 "어디 전화라도 걸어드릴까요?"라고 말을 건넴으로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할아버지는 "괜찮아요. 가던 길 가십시오."라고 하셨다. 엷게 웃으며, 손을 휘휘 저으시며. 서 계실 수 있는 걸 보니 안심이 되기도 하여 할아버지께 인사드린 후 가던 길로 복귀했다. 10미터 정도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할아버지는 아직 벽에 기대어 쉬고 계셨다.


저 여성의 말속에 할아버지를 향한 걱정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저런 말투나 논리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할아버지가 왜 야단맞아야 하지. 야단맞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 쓰러진 할아버지를 보고도 쌩 지나가버린 무정한 사람들이다. 구급차를 부르라는 지시를 던짐으로써 자신의 무관심을 저급한 관심으로 포장하려 한 사람이다. 산책로를 젊고 건강한 사람들만의 점유지로 못 박은 사람이다. 안 그래도 아픈 사람에게 날카로운 말을 푹푹 꽂은 사람이다. 나이 듦, 약함, 실수는 죄가 아닌데도 그것을 죄인 양 판결한 사람이다. 무례한 잔소리에 맞서지 않고 네- 네- 대꾸하시던 할아버지까지 야속해졌다. 눈물이 났다.





*. 메리 파이퍼, 『나의 글로 세상을 1밀리미터라도 바꿀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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