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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Jan 23. 2021

최소량의 날씨를 나도 좋아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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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2월 28일의 산책 -


"최소량의 날씨를 선호"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 메리 올리버는, 『완벽한 날들』에서 이렇게 썼다. "역사를 만드는 격렬한 활동보다는 사색에 잠기고 작품도 구상할 수 있는 길고 쉬운 산책이 좋다. 나는 최고 날씨의 작고 유익한 움직임들이 좋다." 


오늘 아침은 최대량의 날씨였다. 이 동네에서 이 정도 안개는 처음이었다. 기상 뉴스에선 가시거리 200m 이하의 매우 짙은 안개가 꼈으니 유의하라고 했다. 200m는 무슨. 100m 앞도 안 보이는구먼. 오전에 장을 보느라 집 근처를 돌아다녔는데  다른 동네에 온 기분이었다. 

기세 등등했던 안개를 정오의 해가 녹였다. 하얀 솜사탕으로 된 벽들이 싹 허물어졌다. 고개를 90도로 젖혀 훤히 드러난 하늘 꼭대기를 쳐다봤다. 티 하나 없는 파란 천정이었다.


하늘은 깨끗했지만 내 눈은 그렇지 못했다. 하늘을 볼 때마다 투명한 찌꺼기 같은 게 쑥 올라와 내 시선을 따라다녔다. 비문증. 노화현상으로 발생하는 흔한 현상이다. 몸에 어떤 문제도 초래하지 않는 동시에 치료법도 없다. 왠지 모르겠지만 집 안에선 전혀 의식을 못한다. 탁 트인 눈부신 단색을 쳐다볼 때만 눈 속 부유물이 자기 존재를 알린다.


먼지가 떠다니는 눈이지만 낯선 새를 포착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뻥 뚫린 겨울 공원이 화려한 새를 숨겨주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 새는 꼬리와 날개에 까맣고 흰 줄무늬가 있었다. 몸통은 미세하게 붉은 기가 도는 황토색이었다. 부리는 뾰족하니 길었고 뒤통수에도 부리처럼 길쭉한 깃털이 달려 있었다. 처음 보는 그 새 네 마리는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훨훨 건너다녔다.


공원 바닥엔 붉은 스프레이로 X 표시가 드문드문 그려져 있었다. 빨간색 고깔과 공사 정보가 적힌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내 수정체 속 부유물이 저 고깔처럼 벌겋거나 저 안내판처럼 거대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허허벌판 같은 이 공원을 개조시키려나 보다. 나무나 좀 더 심어주고 강변의 쓰레기나 치워주면 좋겠는데(제발)…….


하늘은 파랗지만 공기는 나빴다. 대기의 1층은 회색, 2층은 푸른색으로 나눠져 있었다. 새와 나무와 사람들은 회색 공기를 공평하게 들이마셨다. 그러나 지구에 함부로 손을 대서 공기를 회색으로 개조시킨 범인은 사람이다. 새와 나무들에겐 불공평한 일이었다.


날이 따뜻해서일까. 수영 중인 물새들이 유난히 많았다. 자맥질하는 모습은 보아도 보아도 귀여웠다. 새들의 빛깔은 흰색, 회색, 까만색, 옅은 갈색으로 온통 자연스러웠다.


오래전 우리 집에선 새를 키웠다. 작은 새들이 물통에 들어가 푸르르 몸을 씻는 소리를 나는 좋아했다. 그 소리가 그리워서 걸음을 멈췄다. 오리가 몰려있는 쪽을 향해 가만히 서 있었다. 날개로 물을 두드리는 소리를 기다렸다. 드디어 오리가 푸드덕거렸다. 물소리가 들릴 타이밍이었다. 귀를 쫑긋 세웠다. 시원하게 내 귀에 들리는 소리, "깍깍!" 오리의 첨벙거림과 동시에 내 근처에 있던 까치가 울어버린 것이다. 그래 까치야, 네 소리도 좋구나. 


다시 산책로를 걸었다. 조금 걷다가 핸드폰을 꺼내서 이렇게 녹음했다. "1월이 다 되어가는데 뭐 이렇게 따뜻해?" 장갑을 벗었고 잠바 버튼도 두 개 풀었다. 내 앞의 산책객은 패딩 잠바를 허리에 묶고 하얀 반팔 티 차림으로 걷고 있었다. 아침에 본 뉴스에선 올겨울에 매서운 한파가 올 거라고 하던데 어쨌든 오늘은 이런 날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아까 봤던 줄무늬 새를 검색했다. '겨울 텃새' '우리나라 겨울 새' 등의 키워드로 열심히 뒤진 결과 새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후투티였다. 이름까지 예뻤다. 외국식 이름인가 싶었는데 의외로 순우리말이었다.  '후욱 후욱'하는 울음소리를 따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백과사전에서 후투티의 설명을 읽어보았다. 여름 철새라고 되어 있었다. 그것도 '흔하지 않은' 여름새란다. 아, 그래서 12월인 지금도 보이는 거구나?


여러 기사와 나무위키 내용에 따르면 후투티는 지구 온난화 때문에 텃새화되고 있는 중이란다. 온난화의 영향으로 월동하는 개체는 후투티뿐만이 아니다. 검은이마직박구리나 왜가리, 중대백로 등도 철새였지만 최근엔 사시사철 눈에 띈다고 한다.**


77억 명의 인간을 다 합쳐 놓아도 지구의 무게에 비하면 10조 배 이상 가볍다. 이런 먼지 같은 인간들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탐욕을 발휘한다. 인간 탐욕의 위력은 웅장한 지구 생태계를 조작할 만큼 징그럽고 우리 행성을 데울 만큼 유난스럽다. 지구 온난화는 나의 비문증과 다르다. 그것은 지구의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이 아니다.


아름다운 후투티를 볼 때마다 새를 좋아하는 내 발걸음은 무의식적으로 멈출 것이다. 그렇다 해도 겨울 후투티를 덮어놓고 반가워할 양심은 내게 없다. 눈밭의 후투티는 인간이 변질시킨 지구에 순응하는 작은 자연이다. 여름새를 겨울에도 눌러 앉도록 강제한 인간은 별난 자연이다. 겨울 후투티는 우리 종족에게 날아온 주홍 글씨일지도 모르겠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들린 까치 소리는 지구의 노래였으나, 타이밍에 어긋난 후투티의 등장은 지구의 노기怒氣가 아닐는지. 온화한 최소량의 날씨를 나도 좋아하지만 온화한 겨울은 부끄럽다. 










*.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254418


**. 나무위키https://namu.wiki/w/%ED%9B%84%ED%88%AC%ED%8B%B0

연합뉴스https://www.yna.co.kr/view/AKR20210105115500051

영남일보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01113010001905

고양신문https://www.mygoy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62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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