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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Jan 30. 2021

나의 사적인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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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9일의 산책-



흘러내린 녹물로 얼룩진 외벽, 상호가 바뀌었음에도 옛 간판을 달고 있는 상점. 이런 콘크리트들의 틈새에 우리 동네 골목이 있다. 상징적이고도 물리적인 그림자에 갇힌 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빨리 지나가고 싶은 곳이다. 골목 끝에는 PC방이 있다. 오늘따라  PC방의 회색 페인트칠이 더 우중충해 보였다. 회색 벽과 회색 하늘이 만나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나 보다. 하늘엔 밀도 높은 회색 구름들이 저공비행 중이었다. 내 정수리를 스칠 듯 아슬아슬했다. 구름을 힐끔 경계하며 산책로 입구에 도착했다. 횡단보도를 건너 자연의 회색으로 들어갔다.


두툼하고 넓은 잿빛 구름들은 때묻은 목화 이불 같았다. 그 이불을 덮은 우리 동네는 겨울이라기엔 민망한 온도였다. 산책로를 걷던 어느 견주의 혼잣말이 들렸다. "아이고 더워라, 아이고 더워라."


공원 풍경은 회색이었지만 생명들의 활기는 채도가 높았다. 운동기구 쪽에서는 하얀 반팔 속옷 차림의 중년 남성이 땀을 흘리는 중이었다(물론 바지도 입고 있었음). 트로트가 흘러나오는 소형 라디오를 주머니에 꽂고 힘차게 걷는 산책객도 있었다. 해맑은 강아지 한 마리는 조류계의 깡패인 까치를 향해 내달렸다. 꼬리를 팍팍 흔들며.


내일부터 열흘 동안 한파가 시작된다며 이 언론 저 언론에서 난리였다. 내가 그만한 추위를 뚫을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다. 따뜻할 때 미리 산책을 충전하자 싶어 회색 길을 뚫고 공원에 왔다. 공원 산책로엔 오늘따라 사람이 잔뜩이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나 보다.


흐린 날씨 탓인지 강은 검은색이었다. 여름 강의 반 밖에 안 되는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겨우내 가물어서 물이 말라도 너무 말랐다. 몇 시간 전에, 우리 동네의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10명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강물이나 늘어날 것이지 애먼 확진자만 늘어나는구나.


뿌- 뿌- 하는 트럼펫 소리가 나서 하늘을 보니 흑고니 네 마리가 날고 있었다. 조금 뒤엔 같은 공간의 한 층 낮은 높이에서 직박구리가 고무공 튕기듯 날아갔다. 텃새화되고 있는 후투티 두 마리도 날개 끝을 반짝이며 날아갔다. 여름 철새였던 후투티가 코앞에 닥친 한파를 어찌 견디려는지 걱정이다. 후투티야, 내일부터 따뜻한 데 잘 숨어 있어.


검고 얕은 물가에선 오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몸은 회색이고 머리는 짙은 갈색, 꼬리는 까만색이었다. 날개를 펼쳤을 때 바깥쪽으로 폭이 도톰한 하얀 줄무늬가 한 개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내가 본 인상착의를 힌트 삼아 오리를 검색했다. 흰죽지였다. 날개와 몸통이 연회색이라서 붙인 이름이란다. 한동네 이웃의 이름을 알게 되어 기뻤다.


흰죽지가 모래톱 가까이 왔다. 야생 오리와 이만큼 가까워진 건 처음이었다. 더 자세히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나는 새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래봤자 10미터 이상 멀었다. 하지만 흰죽지에겐 그 거리도 불편했나 보다. 오리는 서둘러 강의 복판으로 헤엄쳐갔다. 놀라게 해서 미안했고 짧은 조우가 아쉬웠다. 그 와중에 분주한 발장구가 만든 물소리는 좋았다. 첨벙거리는 소리가 희미해지자 작은 새들의 짹짹 소리, 오리들의 꽥꽥 소리, '삐이-유'하는 이름 모를 새소리가 허공을 매웠다. '삐이-유'라고 노래한 가수가 누구인지 특히 궁금했다. 저 소리의 정체를 밝히려고 새벽 한 시까지 인터넷을 뒤졌으나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다음에 또 듣게 되면 반드시 녹음해야지.







- 2020년 12월 30일의 산책 -


춥다. 공기가 지나치게 맑다. 구름은 감동이었다. 집 근처 중학교 위에 백조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있었다. 대류를 올라탄 웅장한 백조가 우리 동네를 통과 중이었다.


골목의 그늘 속에는 빙판이 하얀 섬처럼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바람이 셌다. 공중에 매달린 도로 표지판이 바람을 그네처럼 타고 놀았다. 무법자 까치가 내 옆을 총총 지나갔다. 아아, 까치 춥겠다. 나도 이렇게 추운데. 바람이 내 등을 펑 펑 미는 바람에 산책로에 빨리 도착했다.


거대하고 투명한 손이 거대한 구름의 가장자리를 살살 뜯어내고 있었다. 구름 가장자리가 느리게 푸실푸실 변했다.


강의 대부분이 얼어붙었다. 간신히 얼지 않은 강의 중간 부분에서 오리들이 바글거렸다. 강물에 몸을 완전히 잠수해가며 식사 중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잠깐만 손을 꺼내도 죽을 지경인데 오리들은 얼음물속에서도 유유했다.


속상하게도 후투티가 보였다. 오늘은 못 만나길 바랐는데……. 여름 철새의 몸으로 매운 추위를 받아내는 중이었다. 평소의 후투티는 활동적이다. 날아다니거나 땅속 벌레를 탐색하느라고 부산스럽다. 그러나 오늘은 허연 잔디밭에 조각상처럼 앉아있었다.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눈만 깜빡이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두 마리는 양지에 앉아 있기라도 했는데 다른 한 마리는 그늘에 있었다. 음지에 있는 아이를 햇볕 쪽으로 옮겨주고 싶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서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일 외엔 해줄 게 없었다. 동사하지 않기만을 빌었다.


칼바람에 갈대들은 끝도 없이 솨아아아! 소리를 냈다. 너무 추워서 우와아악! 기함하는 것 같았다.


한파 속 산책길이 궁금해서 나온 건데 예상대로 썰렁하고 썰렁했다. 기온이 낮았고 사람이 없었다. 나는 추워서 정신이 없었다. 아래에 두 겹, 위에 다섯 겹을 껴입었지만 뾰족한 바람은 나의 무장을 뚫었다. 장갑, 패딩 모자, 치렁치렁한 목도리, 마스크도 다 뚫렸다. 머리도 시렸고 눈알도 시렸고 마스크에 습기가 차서 얼굴도 시렸다. 바람을 맞으며 걸을 땐 무릎이, 바람을 등지고 걸을 땐 종아리가 시렸다. 강 바람이 나를 쑤욱 쑤욱 밀어주기도 했다. 몸이 어는 것 같으면서도 재밌었다. 어릴 때 아빠랑 산에 오르던 게 생각났다. 아빠는 내 뒤에서 나를 다정스레 밀어 주곤 했다.


집에 오는 길엔 다리가 후들거렸다. 너무 추워서 평소보다 속도를 올려서 걸은 탓이다. 특히 그늘에선 경보하듯 걸었다.


평상시엔 산책로를 반 정도 걸으면 손에서 후끈후끈 열이 났다. 오늘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엄지, 검지, 중지만 겨우 따뜻해졌다. 약지랑 소지는 끝내 얼음장이었다. 뭐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집에 들어왔다. 안경 알이 하얗게 변했다. 갑자기 초콜릿이 먹고 싶어졌다. 뜨거운 찻잔을 언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바닥이 따끔따끔했다. 집에 돌아온 후 몇 시간이 지나도 정수리는 계속 얼얼했다.


내일은 더 춥다는데 산책할 수 있을까? 어려울 성싶지만 내일의 산책로가 궁금하긴 하다. 후투티는 몸을 잘 숨길지, 강은 얼마나 얼어붙을지, 물새들은 어떻게 식사를 해결할지.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 프로빈스타운에서 살았던 메리 올리버는 자기 동네를 '사적인 천국'이라고 했다.* 우리 동네는 그곳처럼 아름답지 않다. 근사한 자연 경관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관광객도 없다. 내 골목은 회색이고 나의 공원은 황량하다. 그러나 이곳에도 강물과 새와 몇 그루의 나무와 하늘과 구름이 있다. 나의 사적인 천국이다.








*. 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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