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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Feb 06. 2021

두 번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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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1월 5일 산책 -


시장 다녀오는 길. 쨍한 햇살과 눈싸움을 하며 집으로 걸었다. 깜빡. 아, 내가 졌다. 진 김에 그냥 눈을 감았다. 눈 감고 걸어도 거리낄 것 없는 인적 드문 골목이었다. 감은 눈 속에서 검붉은 빛이 보였다. 눈꺼풀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오늘은 대한大寒이 놀러 왔다가 얼어 죽는다는 소한小寒이지만 절기와는 다르게 따뜻했다. 깜빡임 없이 부릅뜬 햇살 탓일까. 장바구니를 든 손이 춥지 않다. 이따가 산책을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불확실한 나는, 잠시의 햇살을 진하게 즐겼다. 태양빛은, 우리 동네라는 우주에서 내 얼굴과 정확히 랑데부했다. 차가운 공기보다 힘도 세서 내 살갗과 마음속에 온기를 주었다. 그러고 보면 숫자로 측정되지 못하는 것들이 나를 살게 해준다. 햇빛, 사랑, 고운 말, 포옹 같은 것들. 숫자로 측정되는 것들은 나를 갉아먹을 때가 많다. 초등학교 산수 시간 때부터 한결같이 그랬다.


눈을 떴다. 하늘에 커다란 맹금류가 보였다. 날개를 펄럭이지 않고 빳빳이 펼친 채 활공 중이었다. 아찔하게 높은 공중에서 천천히 유영하는 모습이 까맣고 무섭고 위엄 있었다.


점심 먹은 뒤에 『소로의 야생화 일기』를 읽었다. 이 책엔 수많은 꽃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 '크리산테모이데스도깨비바늘 꽃'이 나온다. 소로우는 그 꽃을 예찬했다. 그러나 책엔 저 식물의 일러스트가 없었다. 요란한 이름을 가진 꽃의 모습이 너무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지고 파보았지만 웹이라는 토양 그 어디에도 저 꽃은 피어 있지 않았다. 모니터 따위는 자신의 무대로 취급하지 않나 보다. 실제 흙 위에서만 발화하겠노라고 단단히 결심한, 지조 있는 꽃이 분명하다. 검색하던 와중에 다른 수확이 있었다. 어저께 동네 강가에서 본 뾰족한 가시 뭉치 식물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다. '도깨비바늘'이었다. 기뻤다. 이젠 이름을 불러줄 수 있어서.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다 보니 오후 6시. 식구들 저녁 차려준 뒤 나는 밥 말고 산책을 선택했다. 밖은 퇴근시간이라 도로가 붐볐다. 차들은 범람하는 강물처럼 차도 위를 흘렀다. 보행자 신호를 받고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찰나, 자동차 한 대가 신호를 무시하고 내 길을 홱 뚫고 갔다. 인상을 잠깐 찌푸렸다가 폈다. 자동차 급류를 지나면 진짜 강이 나오니까.


해가 넘어간 강은 검었다. 검은 강엔 물새 대신 도시의 불빛이 떠다녔다. 차가운 강바람이 매너 없이 나를 퍽퍽 들이받았다. 너무 추워서 걷는 방향을 바꾸어 반대쪽 길로 걸었다. 바람이 뒤에서 부니 한결 살만했다. 그래봤자 집으로 돌아갈 땐  다시 바람과 맞서야 하지만 나는 조삼모사 이야기에 나오는 원숭이처럼 당장의 안일함을 선택했다. 겨울밤의 산책로엔 사람이 없었고, 이유를 알 만했다. 햇살이 퇴장한 1월의 공원에선 바람이 대장이었다. 폭군 같은 바람이 들볶아대는 통에 갈대들은 끙끙 앓으며 허리를 고꾸라뜨렸다. 나는 반환점의 반도 못 가 바람에게 항복했다. 맞바람을 헤집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귀달이 모자 틈새로 바람이 쇳소리로 '내가 이겼지, 그것 보라지.' 했다. 오늘은 햇살과 바람 모두에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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