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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Feb 04. 2021

장난꾸러기를 따라 웃어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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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1월 4일 산책 -


해가 바뀌는 며칠간 집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먹고사는 일에 짓눌려 종종거리느라 그랬다. 새해의 4일째가 되어서야 공원으로 나왔다. 김기석 목사님은 『청년 편지』에 이렇게 썼다.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핀 꽃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깊이 접속하는 것도 우리 삶이고,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염려하는 것도 우리 삶입니다." 새로운 삶 1년 치가 선물이자 소명으로 주어졌다. 올해를 잘 빚어나가고 싶다. 가끔씩 산책이라는 쉼표를 찍으면서.


오늘 하늘은 매끈하게 인쇄된 푸른 색종이였다. 저 색종이로는 바다를 접어봐야겠다. 메리 올리버가 천국처럼 아름답다고 찬탄했던 프로빈스타운의 바다를. 그 바다와 저 하늘이 똑같은 색은 아니겠지만 문제 될 건 없겠지.


산책로 입구엔 겨울 은행나무가 마른 모처럼 조르르 심겨 있다. 풍덩한 노란 잠바를 벗어 흙 위에 덮어주고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알몸을 드러낸지 수개월째이다. 흙은 황금색의 황송한 선물을 부지런히 소화시켜 나무에게 되돌려주고 있었다. 그 덕에 나무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로도 겨울을 견딜 힘을 공급받았다. 나무는 흙을 위하고 흙은 나무를 위한다. 사람은 대체로 사람만 위한다. 은행나무들의 윗부분이 하나같이 V자 모양으로 가지치기 되어 있었다. V의 골짜기가 만든 허공엔 굵은 전선이 이 전봇대에서 저 전봇대로 질주하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전선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뎅강뎅강 잘라놓은 것이다. 도시인들에겐 나무보다 전기가 더 중요한가 보다.


공원엔 공사가 한창이었다. 허허벌판이던 이곳에 인라인스케이트장, 파크 골프장, 등의자, 야외무대를 설치하겠단다. 굴착기 두 대, 트럭 네 대가 가냘픈 잔디를 올라탔다. 산책로엔 벌써 커다란 바큇자국이 드문드문 찍혔다. 인공 구조물은 갈대밭에 버려진 고장 난 우산이나 거대한 스티로폼, 누런 플라스틱 팰릿 등으로도 충분한데. 왜 자꾸 생물이 아닌 무생물을 심으려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기사를 찾아 읽어보니 평소 이 공원이 열악한 환경이었고, 그래서 주민들이 공원을 외면했기에 새로 단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공원엔 주민들이 되게 많이 온다. 날씨 좋을 땐 산책로가 비좁아서 불편할 정도이다. 나는 기사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머리가 나쁜가 보다.


잔디밭 옆에서 흐르는 강이 고체가 아닌 액체라는 게 다행스러웠다. 강 위엔 인라인스케이트장도, 의자와 무대도 쉽게 올려놓을 수 없을 테니까. 살얼음이 군데군데 낀 강에선 물새들이 인간의 방해 없이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얇게 얼어서 물결을 잃어버린 강은 아름다웠다. 산책로와 강의 경계인 갈대밭 어디쯤에 샛길이 보였다. 강을 향해 뻗은 길이었다.  길로 들어가서  강을 가까이 들여다보기로 했다. 짧은 길이었지만 낯선 길에 발을 디디니 짜릿했다.  길엔 초록색 풀도 있었고 땅도 훨씬 푹신했다. 항상 걷던 뿌연 산책로와는 달랐다. 조금 걸어들어가니 강이 성큼 클로즈업 되었다.  강은 파아랬다. 얼음 밑으로 공기방울이 조금 보였다. 판판한  위로 삐죽 나온 마른 풀이 보였다. 강을 덮은 얼음은  종류가 아니었다. 어떤 얼음은 어두운색이었고 어떤  밝은 , 어떤  희끗희끗한 색이었다. 질감도 서로 달라서 무늬가 있거나 까끌까끌하거나 매끈했다. 나뭇잎이나 돌멩이를   얼음도 있었다. 자연은 지루하지가 않다. 더구나 내가  곳은 여름마다 강이 범람하는 자리였다. 폭신한  위에 서서 강을 곁에 두고 보는  겨울 산책객의 특권이었다. 행복했다.


갈대밭 속은 푸근했다. 키 큰 갈대들이 포클레인과 트럭을 가려 주어서 좋았다. 전엔 몰랐는데 오늘 보니 갈대밭에 억새도 섞여 있었다. 분명히 억새였다. 잔털이 하얀 억새. 많지는 않지만 조금 있었다. 검색해 보니 강둑에서 자라는 물억새인 것 같았다. 도미노처럼 쓰러져 있는 갈대들도 보였다. 서로를 베고 누운 갈대들이 편안해 보였다. 대부분의 갈대들은 자다 깬 머리를 한 채 비틀 비틀 서 있었다. 머리털 색이 조금씩 달랐다, 어떤 건 고동색, 어떤 건 황토색. 전혀 정돈되지 않은 이 갈대밭이 나는 즐거웠다.


갈대밭을 나와 다시 산책로를 걸었다. 강 저 멀리 백로 두 마리가 보였다. 분명 둘 다 새하얗고 S자 목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마리는 큼직했고 한 마리는 작았다. 부모와 아이였을까? 대백로와 쇠백로였을까?


산책로 반환점 부분에선 작은 물새들이 바글바글했다. 평화로워 보였는데 실은 재난이었다. 거기엔 강물로 합쳐지는 작은 개울이 있다. 개울은 완전 쓰레기 천지였다.


씁쓸하게 반환점을 찍고 돌아오는 길 위에 녹색의 작은 동그라미들이 보였다. 허옇게 건조된 잔디밭에, 실처럼 가냘프지만 초록빛을 띤 풀들이 동그란 무리를 지어 듬성듬성 돋아 있었다. 초록색 페인트가 입구까지 찰랑거리는 통을 들고 가던 누군가가 실수로 땅에 페인트 몇 방울을 흘린 형상 같았다. 예뻤고 측은했다. 얘들아 아직 봄이 아니야,라고 눈으로 얘기해 주었다.

줄기 끝에 뾰족한 가시 뭉치를 달고 있는 식물도 있었다. 불꽃이 팡 터지는 순간의 모양 같기도, 중세 시대 무기인 스파이크 볼을 닮기도 한 식물이었다. 이름이 궁금해서 핸드폰의 스마트 렌즈 기능으로 찍어보았지만 식물명은 검색되지 않았다.


그리고 후투티. 후투티를 아홉 마리나 보았다. 얘네들을 한 번에 이렇게 많이 본 건 처음이었다. 후투티들이 즐겨 앉던 나무의 아래쪽에 모여 있었다(앞으론 이 나무를 후투티 나무라고 불러야겠다). 후투티들은 긴 부리로 깊숙이 땅을 쑤시는 중이었다. 굉장히 부지런히 정신없이 땅을 쑤셨다. 하필 내가 지나가야 하는 길에서 그러고들 있었다. 발이 묶인 나는 얌전히 후투티들의 식사를 감상했다. 땅에 담갔다 뺀 후투티의 부리 끝에서 벌레가 딸려 올라왔다. 부리를 뺄 때마다 그랬다. 백발 백중이었다. "와!" 소리가 튀어나왔다. 내 발밑에 저렇게 많은 벌레가 있다는 것과, 흙이 투명하다는 듯 벌레를 쏙쏙 건져 먹는 후투티가 경이로웠다. 마태복음 말씀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 6:26)


산책이 다 끝나갈 때쯤 "꽥꽥! 꽤액 꽥 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장난꾸러기의 목소리와 꼭 닮았다. 희극인이 던지는 회심의 일격 같기도 했다. 나는 오리 소리가 왜 이렇게 웃긴지 모르겠다. 들을 때마다 웃지 않곤 못 참는다. 그러니까 저 소리는 새의 '울음'이 아니라 '웃음'이다. 갈수록 더러워지고 파헤쳐지는 공원 사정 따위엔 눈 감고 나도 오리처럼 깔깔 웃어버릴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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