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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Feb 14. 2021

이 작은 응원봉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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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2일의 산책-


따뜻해진 공원에 사람들이 득시글했다. 산책로를 '먼지로路'로 개조하던 며칠 전의 트럭은 보이지 않았다. 먼지 걱정이 사라진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책객들의 행렬에 합류했다. 강은 어제까지의 추위로 조금 경직돼 있었지만 포근한 날씨 탓에 축축하게 땀을 흘렸다. 퍼석하고 말랑해진 강 위로 물새들이 돌아왔다. V자 물결을 그리며 전진하는 모습이 반가웠다.


안면이 있는 강아지도 반가웠다. 항상 미니언즈 캐릭터 옷을 입고 오는 푸들인데 그 애는 발에 스프링이 달린 것처럼 푱 푱 뛰었다. 내 눈동자는 강아지와 투명한 하네스로 연결됐다. 산책의 기쁨으로 흥분한 대형견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견주처럼 내 동공은 속절없이 푸들에게 이끌렸다. 강아지는 공사 안내판 쪽으로 내달렸다. 쇠로 된 그 비대한 사각 철판은 햇빛을 반사하느라 번뜩이고 있었는데 마치 4차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다. 노란 티와 청바지를 입은 강아지는 네모 발광체 속으로 흡수돼버렸다. 날카로운 햇발이 강아지와 나를 연결하던 가상의 하네스를 잘랐다. 뾰족한 빛에 눈을 찔린 나는 눈꺼풀을 콱 구기며 닫았다. 공원에서 진행 중인 공사는 나의 즐거움을 다양한 방식으로 훼방 놓는다.


그럼에도 나는 공원에 온다. 산책로에서 나는 아무 직위가 없기 때문이다. 집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허다한 일거리를 주고, 주고, 준다. 집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마음이 가뜬해지는 건 무책임, 무의무, 무노동의 공간으로 입성한다는 안도감 때문이다.


오늘 아침엔 예기치 못한 업무 메일을 받았다. 예전에 작업했던 이모티콘을 여차여차한 이유로 '당장' 수정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급하게 펜을 쥐었다. 노동요를 재생할 틈도 없이 적막한 진공 속에서 노동했다. 저장하는 데 30초가 넘어가는 묵직한 그림 파일 여섯 개를 완성했다. 마음이 목 졸리듯 눌렸지만 마감 시간을 지켰다. 그 후에도, 주머니칼로 수풀을 자르며 정글을 전진하듯 이 일, 저 일, 요것, 조것을 처리했다. 점점 마음의 기갈이 정신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정수리와 발바닥에 난 뚜껑을 열고 환기를 시켜야만 했다. 이것이 오늘 산책의 구실이었다.


업무 메일을 확인하기 전에 어떤 기사를 읽었다. 두 여성의 사망 소식이었다. 두 분 모두 일하다가 기계에 깔리는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내가 '일에 깔려 죽을 것 같다'라고 말하는 경우, 그것은 비유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그 표현은 비유가 아닌 물리적인 현실이 됐다. 나는 일에 깔려 죽어본 적이 없다. 왜 어떤 이는 깔려 죽기까지 일해야 하나. 왜 저런 환경이 즉각 수정되지 않을까. 어째서 이런 일이 계속되는 건가. 노동이 나를 짓누를 때 보약처럼 30분의 산책을 챙겨 먹을 수 있는 내 삶은 죄스러울 만큼 호사스럽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걸으며 새소리를 듣고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일상 속 해방의 조각을, 나는 누리고 있다. 이 하찮은 쉼표와 안전한 삶을 내 이웃들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하물며 조물주께서도 6일 일한 후 7일째 날에 쉬셨다. 피조물의 몸이 어떻게 혹사를 견딜 수 있을까. 아 하나님. 내 이웃들을 위하여 안식을 주소서. 사람이 부품처럼 사용되다가 끝나는 것이 아닌, 인간답게 존재하다가 눈을 감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신께 탄원했다.


언론사 사회면에 적히는 불가사의들에 비하면 공원에서 겪는 낭패들은 차라리 낭만이다. 기껏해야 괄괄한 공사 트럭의 먼지를 뒤집어쓰거나, 개나 고양이의 똥을 밟는 사고들뿐이니까. 게다가 오늘 날씨는 봄의 예고편 수준이었다. 돗자리를 들고 온 가족까지 있었다. 할머니와 엄마, 아이들 둘이서 빨간 체크무늬의 매트를 펼치는 중이었다. 그때 하늘에서 우루루 새들이 달렸고 노란 마스크를 한 어린애가 손에 쥔 매트 모서리를 놓쳤다. 아이는 새를 보며 "와아아아!" 길게 소리 질렀다. 근처 모래톱에선 견주 셋, 강아지 셋이 뛰놀았다. 삶이라면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것들이 여기에 다 있었다.


한동안 가보지 않았던 산책로로 향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쪽 강은 완전히 얼어 있었다. 얼음에 발이 쩍쩍 달라붙는 게 싫은 물새들은 다 도망갔다. 물결도 오리도 없는 휑뎅그렁한 강. 널찍한 자연 빙상장을 보노라니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그는 허옇게 언 강 위에서 중력의 간섭을 조롱하며 시원하게 달리고 날았다.


상상의 피겨 선수는 곧 아지랑이처럼 공중으로 피어올랐다. 그 허공에서 까마귀가 깍깍대며 날았다. 까마귀의 위층에선 구름이 얼음 흉내를 내고 있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다가 마지막 음절인 '다'에서 멈춘 자세였다. 구름들은 정지 화면을 연기했지만 사실은 술래를 향해 스을-그음-스을-그음- 흘러가고 있었다. 장난꾸러기 구름들의 멎은 척에 나는 속지 않았다. 저 꾀돌이 꾀순이들을 감시할 심판이 필요해 보였다. 그 일을 핑계로 잔디밭에 아무렇게나 누워 멍하니 하늘을 마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소한 일탈도 감행하지 못했다. 내 소심함을 아쉬워하며 그냥 걸을 뿐이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도깨비바늘을 만났다. 누런 풀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녕 도깨비바늘아? 나 이제 네 이름 알아.' 작고 깡말랐지만 힘찬 가시를 동서남북으로 벌린 모습이 당찼다. 작은 섶나무의 뾰족한 힘이 내 옷에 달라붙었다. 집이라는 쳇바퀴로 복귀하는 나에게 착륙한, 작은 응원 같았다. 이 작은 응원봉들을 꽃가루처럼 내 몸에 묻힌 후, 꽃 같은 내 이웃들에게로 운반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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