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그대란 바다

고마워, 그대란 바다


자꾸 나이 타령을 하기는 싫지만 앞 숫자가 변할 때만큼은 다르다. 이십에서 삼십으로 넘어갈 때를 돌이켜 보면 물론 기분이 마냥 좋았던 것은 아니만 싫지만도 않았다. 앞으로 펼쳐진 시간에 대한 기대가 더 컸던 것 같다. 물론 그때는 미혼이었기 때문인 까닭도 있을 것이다. 당시엔 작업 중인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완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고 누구를 만나서 결혼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다.


서른두 살에 결혼을 해서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신세계가 바로 내 옆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남편’이었다. 결혼에 대해서 난 그리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만약 오랜 연애 시간이 있었다면 결혼 생활이 좀 더 수월했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내가 듣기로 결혼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야 연애 기간이 짧았던, 길었던 결혼 생활이란 연애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했다.


남편이라는 바다.


그 바다 속에는 돌고래처럼 귀여운 생명체도 살고 있지만 잘못 건드리면 이빨을 드러낸 상어를 만날 수도 있다. 때론 해파리에게 쏘이기도 한다. 진주조개가 살기도 하고 싱싱한 전복도 가득하다. 망망대해에서 배 위에 누워 바라보는 하늘은 어떻고. 햇빛 가득하고 물결 잔잔한 따사로운 봄날의 보트 여행이라면 말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물론 그러다가 갑자기 비바람을 맞아 폭풍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때도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그의 바다는 ‘시댁 식구’라는 새로운 생명체들을 품고 있었다. 그 시댁 식구들은 결혼 전에는 바다 속 동굴에서 가만히 들어앉아 있다가 결혼 후 내가 그의 바다 속에서 살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나의 마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그 동안 만날 일 없었던 사람들이었기에 처음엔 마냥 호기심으로만 다가간 것 같다. 하지만 그 동굴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생명체가 하나 살고 있었고 어느 날 그 생명체의 독에 쏘이자 난 그 동굴을 멀리하게 되었다. 어떤 때는 그 바다를 아예 벗어나 내가 살던 마을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지난 십 년 간은 그 생명체를 부단히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걸 위해 심리 치료까지 받아가면서.

물론 공존의 상태까지 아직 이르렀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마음이 그래도 많이 편해졌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도 숱한 눈물의 밤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결혼 후 맞닥뜨린 전혀 새로운 세계는 기존의 도서관과 카페들로 즐비한 내 마을과는 전혀 달랐다. 어떤 소설책도 내가 당시 당면한 상황보다 갖가지 문제들을 담고 있지 않았다. 왜 ‘남의 큰 상처보다 자기 손톱 및 가시가 더 아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그렇게 사랑했던 소설책과도 멀어지고 글쓰기도 열심히 하지 않게 되었다. 난 내 문제를 풀기 위해 분주했다. 눈에 들어오는 책이란 오직 마음치료, 명상, 인간관계서 뿐이었다. 한 사람을 품기가 천하를 품기보다 어렵다는 걸 몸소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또한 결혼 전 결심한 결혼 후에 글쓰기에 더욱 매진하리라는 계획은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몇 번이나 공모전에 내 봤지만 떨어졌고 인터넷에 올렸을 때는 혹평 또한 감수해야 했다. 시댁 관련해서 마음은 마음대로 힘들었고 그 마음을 안고 글을 쓰는 것은 더욱 아픈 일이었다.


그렇게 결혼 후 구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도대체 지난 구 년 동안 난 뭘 한 걸까. 앞자리가 3에서 4로 바뀌게 되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열심히 살았던 거 맞나. 정신적으로는 성숙했지만 실질적으로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


만약 육아를 했다면 벌써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도 남았을 거다. 다른 친구들처럼 아이라는 확실한 결과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치열한 내면의 싸움, 혹은 쓸데없는 감정의 소비를 하느라 시간을 소비했다는 생각에 너무나 괴로웠다.

서른아홉의 끝자락. 자책감이 들어 며칠 간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시간이 되면 일하러 가고 밤에 돌아오면 바로 침대로 직행하는 게 전부였다.


어느 토요일 아침.

기운 없이 화장대 앞에 앉아 있을 때 남편이 다가왔다.

“요새 기분이 안 좋은 거 같아. 무슨 일 있어?”

남편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지난 구 년을 뭐하고 살았는지 모르겠어.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쇼핑만 해대고.”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면 됐어.”

지금 그때 남편의 말을 돌이켜 보니 좀 우습다. 왜 남편들은 이렇게 직설적인 걸까. 돌려서 “아니야, 지금까지 충분히 열심히 살았어.”라고 그냥 말해줄 수는 없는 걸까.

하지만 그 당시 나는 반박하거나 화 낼 힘도 없었다. 흘려보낸 구 년에 대한 자책감이 너무 커 눈물이 다 났다.

그 때 내 등을 감싸 안는 남편의 온기가 느껴졌다.

“이제부터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시작해. 내가 다 도와줄게. 그리고 과거는 다 잊어.”

힘이 났다. 나도 남편을 꼭 안았다.


그 날 이후로 남편과 더욱 친밀해진 기분이다. 서로를 더욱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다가오는 사십대를 알차게 잘 보내려는 결심이 섰다. 남편은 그 날 시댁에 가려는 일정을 변경하고 우리는 그날 함께 점심을 먹고 오락실에 가서 신나게 놀았다. 너무 행복했다.


여기는 다시 물결 잔잔한 남해의 봄 바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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