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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Jan 04. 2021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남편은 수리 기사여서 여름에 더욱 바쁘다. 평소에도 일곱 시 혹은 여덟 시에 퇴근하지만 여름이면 에어컨 고장 접수가 잦아 평소보다도 훨씬 퇴근 시간이 늦어지곤 한다. 

신혼 초 어느 여름 날, 솜씨를 부려 ‘오이냉국’을 준비했다. 냉국은 국물이 생명이다. 식초와 설탕, 다진 마늘로 맛을 내서 오이, 양파, 고추를 넣고 물을 붓는다. 미역은 음식을 내기 전에 넣을 생각이어서 건드리지 않았다. 집에 오는 길이라고 전화가 오면 그때 불려서 넣을 생각이었다. 미리 얼음을 얼려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름이라 입맛이 없을 남편을 위한 나의 배려였다. 이제 곧 오겠지. 그 때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일이 많이 늦을 거 같아.”

“언제쯤 올 거 같은데?”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 마음이 조금 울퉁불퉁해지고 있었다. 

“모르겠어. 가 봐야 알 것 같아.”


내가 바라던 결혼 생활이란 저녁을 같이 먹고 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는 개뿔. 같이 저녁 먹는 것도 어려웠다. 빨라야 일곱 시, 여덟시에 때론 아홉시에 퇴근하는 남편과 저녁을 같이 먹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반면 결혼 전 아빠는 늘 여섯시에 집에 도착하셨고 우리 가족은 일곱 시 전에 저녁 식사를 마쳤다. 저녁은 늦어도 자기 두 시간 전에는 먹어야 한다는 게 아빠의 지론이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늦은 저녁과 야식은 비만을 부를 뿐이다. 남편 일이 이렇게 늦게 끝난다는 걸 미혼 때는 몰랐다. 알고 보니 그때는 남편을 장가보내기 위해 동료들이 도움을 주어 일찍 일을 끝내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열시 안에는 오겠지, 그때까지는 속 편히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저녁도 먹지 않고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이 냉국을 먹으면 매우 좋아할 거야, 생각하면서. 

하지만 열시가 지나도록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를 해 보았다. 오 마이 갓! 받지 않았다. 남편이 전화를 받지 않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남편은 아무리 수리 중이어도 전화를 받아서 “지금 수리 중이야. 이따가 연락할게.” 하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혹시 일하다가 뭔 일 난 거 아냐?’

남편은 늘 이야기 하곤 했다. 자신은 에어컨 실외기 청소할 때가 가장 아찔하다고. 에어컨 실외기는 대개 한 평도 안 되는 야외 공간에 있는데 거기에 착지하기 위해 베란다를 넘어야 할 때가 가장 심장 떨린다고 했다. 고층 아파트에서 그 작업을 할 때는 생과 사를 건너는 기분이라고 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하다고 한다.

별별 생각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혹시 나한테 거짓말하고 어디 딴 여자 만나고 오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니 영 잠이 오지 않았다.     

 


남편이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시간은 밤 열 두 시를 훌쩍 넘겨 한시를 향해 갈 때였다. 작업복은 온통 땀에 젖어 있었고 얼굴은 개기름에 번뜩였다. 냉장고 수리가 늦게 끝났다고 남편은 힘없이 말했다. 아침에 볼 때보다 십 년은 늙어 보였다. 딴 여자를 만나고 왔다 하기엔 지나치게 거지꼴이었다. 혹시라도 다른 여자를 만나고 오는 건 아닌지 의심했던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회사기에 이렇게까지 사람을 부려먹나.’

기가 막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남편이 너무나 안쓰러운 반면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를 화였다. 그게 남편 회사를 향한 화인지, 아니면 일을 빨리 끝내지 못하고 자정이 넘도록 남의 집에서 수리를 하고 온 남편을 향한 화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대한 친절하게 이야기했다. 

“자기야, 와서 저녁 먹어. 시원한 냉국 준비했어.”

“별 생각 없는데.”

남편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살짝, 아주 살짝 부아가 치밀었다. 

“조금이라도 먹어봐. 빈속으로 잘 수는 없잖아.”

최대한 사근사근 이야기했다.

남편은 그제야 식탁 앞에 앉았다. 작업복을 입은 채로. 힘이 하나도 없이, 어깨는 앞으로 수그리고 손 하나를 턱에 괸 채로 마지못해.      


한 숟가락. 


딱 한 숟가락이었다. 

남편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더 이상 못 먹겠어.”

“왜 맛이 없어?”

자연스럽게 톤이 올라갔다.

“간이......”

남편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놈의 다시다를 안 넣어서 싱겁다는 건가. 남편은 어떤 음식이건 다시다를 넣어야 맛이 살아난다고 믿는 사람이다. 오징어 국을 끓일 때에는 꼭 고춧가루를 풀어 넣어야 하는 사람. 된장찌개를 끓일 때에는 시판 된장을 써야 하는 사람. 떡볶이조차 밀가루가 들어간 밀떡을 고집하는 사람. 오징어 국에다가 라면을 끓여 먹는 사람. 소고기보다 삼겹살을 좋아하는 사람. 밥을 먹고 나면 늘 과자를 먹어야 하는 사람. 일주일에 하루는 치킨을 먹어야 한 주를 제대로 보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게 남편이다.  

반면 나는 항상 자연식으로 요리해 온 엄마와 함께 결혼 전까지 함께 살아서인지 싱거운 음식에 혀가 길들여져 있었다. 담백한 오징어 국을 선호하는 사람. 된장찌개는 엄마가 만든 된장으로 끓여야 제 맛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떡볶이는 쌀떡이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 라면을 끓일 때 스프를 정량보다 적게 넣는 사람. 밥 먹고 후식으로는 과일 이외에는 모르는 사람. 치킨이란 생일 이외에는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 삼겹살보다는 담백한 목살을 목살보다는 소고기를 좋아하는 사람. 조미료 넣는 걸 죄악으로 생각하는 사람. 이게 나이다.      



참자, 참자, 참자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참아야 하느니라. 땀에 절어 온 남편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되느니라. 


“그냥 잘래.”

남편은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남은 냉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수구에 부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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