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선생님."
영어부장, J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뭔가가 있다.
"다음부터 일찍 와서 인사도 좀 하고 수업 어떻게 할 지 보고도 해요."
잘 해보려던 마음이 푹 고꾸라진다. 그래, 상사 눈에 자주 띄는 게 사회 생활에서 중요하다고 했지. P는 수업 시간 임박하기까지 혼자서 수업 진행을 연습했던 게 후회스럽다. 이미 엎질러진 물. 그리고 엎질러진 마음.
마음이 굳어버리고 있다. 쪼그라들어 단단해져 버린 마음이 제멋대로 울퉁불퉁 거리네. 이제 수업에 들어가야 하는데.
다행히 아이들은 P의 말을 잘 따라준다. 일년 동안의 규칙들을 설명하고 아이스브레이킹 게임까지 무사히 마친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상한 마음 위에 연고처럼 덮힌다.
요새 들어 P의 마음은 부쩍 작아져 있다. 한 달 전쯤, J는 P에게 도장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J의 목소리에서 좋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다음 날 P는 제과점에서 롤케이크를 하나 사갔다.
J의 책상에는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어제 교무실에서 P선생 평가회의가 있었는데 좋은 이야기보다 안 좋은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
P는 도장 뚜껑을 열고 인주까지 묻혀 온 걸 후회했다. 인주가 말라가는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네 알겠구요, 그래서 학교 측에서는 아직 결정이 안 났다는 거에요?"
당돌하게 J 에게 따지고 들었지만 가슴 한 켠에서는 이미 눈물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긴 할 건데. 올해는 좀 더 신경써야 할 거야. 내년엔 어떻게 될 지 나도 모르겠어. 교실 장악력이 너무 떨어진다고 말이 많아."
"저는 작년에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영어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했던 거에요."
P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원망이 묻어났다.
"자기 수업을 자기가 객관적으로 본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야." 한숨 쉬듯 J가 한 말이 가슴 속을 후비는 느낌이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오면서 롤케잌을 J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 후 한 달 동안 P는 자신의 수업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스스로의 교육철학을 점검해보고 다른 이들의 수업을 촬영한 동영상을 보면서 새 학기 수업을 연구했다. 그리고 개학 첫 날, 또 다시 뜻밖의 지적과 마주친 것이다.
퇴근길이다. P는 늘 걸어서 출퇴근을 한다. 횡단보도에 선다. 지금 P는 고민 중이다. 오십 미터 정도 지나쳐 온 카페에 갈까, 말까. 지금껏 몇 번이나 지나쳤지만 들어간 적은 없었다. 오늘 한 번 가볼까. P는 자신이 커피 한 잔 하면서 마음을 달래보려고 하는 걸 안다. 굳어버린 마음을 풀어주려고 하는 거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P와 동년배로 보이는 남자가 무뚝뚝하게 인사를 한다. 손님은 그녀 뿐이다. 아메리카노요. 이 가게에는 에스프레소 머신이 없다. 주인은 손바닥만한 모카포트에다가 커피가루를 붓더니 가스버너에 올려놓는다. 야외에서 고기 구울 때 쓰는 부루스타다. 재밌네. 주인은 말주변이 없는지 P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커피만 만든다. 어색함을 참지 못하는 P는 자리로 돌아가 책장을 훑어본다. 그리고 책을 하나 뽑는다.
주인장이 커피를 내 온다. 모카포트를 열더니 그녀 쪽으로 손부채질을 한다. 커피 향을 먼저 맡으세요. 참 재밌네. P는 재밌다고 생각하려 애쓴다. 주인장은 모카포트에서 커피잔에 커피를 따라주고는 뜨거운 물을 부어준다. 맛있게 드세요. 그녀도 꾸벅 인사를 한다.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그녀가 뽑은 책이다. 책은 너덜너덜하다. 책 표지를 보고 있으려니 마치 고등학교 때 학급 문고 책장에서 만났던 것 같은 친숙함이 든다.
그래,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그녀는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모든 일은 사소하다' 라고 책머리에 씌여져 있다. 그래, 모든 일은 사소해. 모든 일은 사소해. 사소할 뿐야. 아무것도 아냐. 그냥 지나가게 놔 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