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내 앞에는 A의 애인이 앉아 있다.

"못 뵌 사이에 A씨 흰머리가 늘었네요."


A씨가 음식을 가지러 간 사이 그녀에게 말을 붙여 보았다.

"예전에는 염색을 자주했던 거겠죠."

뾰루퉁한 말투였다. 여긴 A의 애인 집이다. 내가 못 올 데를 온 걸까, 난 입을 닫고 생각했다.


일 년에 한 두 차례는 꼭 A를 만나러 서울에 올라왔다. 사실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A를 만나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 간절한 순간이 일 년에 몇 차례 있었다. 말하자면 A씨는 나의 멘토 같은 인물이었다. 얼굴이나 봐요, 몇 달만의 전화 통화에서 A는 자신의 애인 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드디어 애인이 집을 구했다고 했다. A는 레즈비언이다.


지하철역에 도착해 A에게 전화를 했다. 받은 사람은 A의 애인이었다. A는 음식을 만드느라 바쁘다고 했다. A씨 애인이 골목 어귀에 나와 있었다. 몇 년 전, 모임에서 그녀를 본 후 처음이었다.


우리는 삼년 전 여성 단체 소모임에서 만난 사이이다. 모임이 끝나면 우리는 늘 음식을 나눠먹었었다. 누군가는 텃밭에서 키우는 상추를 가져 오고 어떤 이는 집에서 담근 장아찌를, 다른 이는 조미되지 않은 김과 양념간장을 가져왔다. 그 당시 어머니와 함께 살던 A씨는 고구마와 사과를 주로 가져왔다. 소박하고 건강한 밥상이었다. 그 당시 학생이었던 나는 먹을거리를 가져오는 대신 설거지를 도맡았다.


A씨가 의견을 말하면 누구나가 경청했다. A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느 자리에서건 조리 있고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첫 모임에서 그녀는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밝혔다. 모임이 시작한 후 일 년 후 즈음인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A씨 옆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꼭 잡은 두 손보다 그 둘의 이목구비가 자아내는 분위기가 무척 닮아 있어 단번에 애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지구에서 자신과 닮은꼴을 찾아낸 그 두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는 내게 놀랐다, 이 둘은 평생의 짝이구나, 헤어지지 않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A씨가 내 온 쌀국수를 다 먹어갈 즈음이었다.

"K하고는 어떻게 지내요?"

A씨의 질문이었다. 그 질문을 받고 나서야 나는 A씨에게 얼마나 내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어 했는지 깨달았다.


"우린 서로 닮지 않았어요."

둘은 말이 없었다. 좀 더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내가 세모날 때 그 사람은 네모가 되고 말아요. 내가 모처럼 둥글어지면 세모가 되어 날 찌르죠."


"힘들겠어요."

A씨 애인이었다. 낮게 가라앉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둘은 참 닮았어요. 닮아야 잘 산대요."

난 그 둘을 보며 말했다.

"우린 무엇보다 솔직한 게 닮았어요. 다 이야기하잖아. 전 애인하고 체위는 어땠는지까지."

갑자기 A씨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애인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따스했다. A씨 애인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술자리를 대충 정리하고 A씨는 내 잠자리를 마루에 봐 주었다.

"잠깐 들어와 봐요."

A씨의 애인이 방 밖에서 고개만 내민 채 A를 불렀다. A씨는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왜 그런 이야길 해요?"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둘이 있을 때 할 이야기하고, 남한테 할 이야기가 있지. 내 연봉 이야기를 왜 하냐구요. 왜 우리 은퇴 계획까지 다 말하는 건데?"


술자리에서 A씨가 애인의 연봉을 내게 이야기했던 걸 두고 말하는 것 같았다. A씨가 애인의 연봉을 말할 때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애인의 연봉을 자랑스러워하면서 내게 이야기했던 걸로 난 기억했다. 그건 애인의 새로 구한 집만큼이나 A씨의 소박한 자랑거리였다. 난 멀거니 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다투는 소리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A씨의 어르는 말소리와 A씨 애인의 낮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난감하게 이불 속에 앉아 있었다. 방문이 열리고 A씨의 애인이 빠끔히 얼굴을 내밀었다. "미안해요, 수연씨." 하지만 얼굴은 무표정이었다. 문득 A씨가 갑자기 늙어버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괜찮아요, 안녕히 주무세요." 난 억지로 웃어보였다.

어둠 속에서 핸드폰을 열었다. K에게서는 아무런 전화도 문자도 와 있지 않았다. 뭘 기대했던 거야? 그를 만난 뒤로 더 외로워지는 마음에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허전한 마음에 이 뉴스, 저 뉴스를 괜히 클릭했다. 개기월식이 시작되고 있다는 모바일 뉴스를 클릭했다. 시민들이 구경하러 한강에 모여 있다고 한다. 바로 앞이 한강이었다.


이제 곧 지구 그림자에 달이 가리어진다고 했다. 잠시 동안이지만 달이 없어진다고 했다. 하늘에서 달이 지워진다. 조금씩. 그래, 이제 떠날 때가 되었어. 방문 안 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조용히 가방을 챙겨 현관문을 닫고 나선다. 내 안에 무엇이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는지 보기 위해.

이전 21화비를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