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처음으로 일기 숙제를 받아오던 날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그때 참 의욕이 넘쳤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글쓰기는 자신 있었거든요. 명색이 작가인데, 다른 엄마들보다는 잘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좋아. 첫 일기로 뭘 쓸까?”
아이는 치킨 먹은 얘기를 쓰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러라고 하며 일기장과 연필을 준비해줬지요. 아이가 첫 문장을 썼습니다. ‘나는 오늘 치킨을 먹었다.’
“음~”
저는 그 문장이 걸렸습니다. 남들 다 ‘나는 오늘’로 시작하는데 꼭 그렇게 시작해야 할까, 다른 방법이 없을까 고민이 되더군요.
“‘나는 오늘’ 이렇게 시작하는 건 흔한 방법이잖아. 혹시 다르게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
아이가 멀뚱멀뚱 쳐다봤습니다.
“그래, ‘저녁으로 치킨을 먹었다’. 이렇게 바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
제 말에 아이는 자신이 쓴 문장을 지우고 ‘저녁으로 치킨을 먹었다’라고 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런데’를 ‘그런대’로 적더군요.
“아니지. ‘대’ 아니고 ‘데’.”
아이가 깜짝 놀라 했습니다. 아마 글을 쓰려고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제가 갑자기 말을 걸어서 놀란 모양이었습니다. 그래도 군말 없이 글씨를 지우고 다시 썼습니다. 그런데 몇 줄 안 쓰고 ‘참 재밌었다’하면서 끝내려고 했습니다.
“잠깐만, 잠깐만, 뭐가 재밌었는데?”
아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습니다.
“치킨 먹은 거.”
“그러니까 치킨 먹은 거 뭐가 재밌었냐고. 엄마 아빠랑 같이 먹어서 재밌었어, 아니면 닭다리만 골라 먹어서 재밌었어 뭔가 설명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아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연필을 노트 위에 탁 내려놓았습니다.
“나 안 해.”
“왜 안 해, 다 했는데. 얼른 써봐.”
“쓰기 싫어.”
“싫은 게 어딨어. 학교 숙젠데~”
아이는 억지로 ‘치킨 먹은 게 참 재미있었다.’라고 쓰더니 방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지긋지긋한 숙제 하나를 끝낸 것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가더군요. 저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아니 혼자 숙제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엄마가 옆에서 봐주기까지 하는데 도대체 뭐가 못마땅하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아팠습니다. 아이의 첫 글쓰기 경험을 그런 식으로 하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뭐가 잘못됐을까? 말을 너무 불친절하게 했나? 애가 지금 쓸 기분이 아닌데 쓰자고 했나? 아니면 치킨 먹은 얘기 말고 다른 걸 썼어야 했나?’
아이 맘속에 있는 진짜 이유를 찾기 위해 여러 밤을 뒤척였습니다. 아시겠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데 서툽니다. 그래서 징징거리거나, 몸을 비틀거나, 안 하겠다 버티는 것으로 표현을 하지요. 부모는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의 언어를 해독해야만 합니다. 암호 편지를 척척 풀어내는 스파이도 자녀의 몸부림을 언어로 해독해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고민해서 저는 결국 아이의 뜻을 알아냈습니다.
“왜 엄마 맘대로 해!”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그거였습니다. 생각해보니 ‘나는 오늘’이 거슬린 것은 제 마음이었고, 그 대안을 고민한 것도 제 머리였습니다. 제 생각과 표현을 아이에게 강요하고, 납득할 수 있게 쓰라고 다그치고 있었던 거지요. 자신의 마음과 의도를 전혀 담을 수 없는데 아이가 계속 글을 쓰고 싶었을까요?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그저 노동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그 사실을 깨닫고 아이가 쓰고 싶은 대로 쓰게 해 주려고 무척 애를 썼습니다. 아이가 이상한 문장을 만들어내도, 맞춤법을 틀려도 그냥 두었습니다. 아마 일기 검사를 하는 선생님은 답답하셨을 겁니다. 숙제를 엉망으로 해왔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아이가 쓰고 싶은 대로, 본인의 역량껏 쓰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나아지더군요. 표정이 밝아지고 글을 쓸 때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여러 가지 숙제 중에 뭐부터 할지 물으면 일기를 제일 먼저 하겠다고 들고 오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래 글은 이렇게 써야지.’ 저는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아이가 3학년이 되어 ‘자유 글쓰기’를 숙제로 하게 된 날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그날 포켓몬의 여러 가지 타입과 진화과정 등을 쓰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라고 했지요. 그리고 물었습니다.
“첫 문장 어떻게 쓸 거야?”
대화를 통해 일단 그날의 이야깃거리가 정해지면 저는 항상 아이에게 첫 문장을 어떻게 쓸 건지를 물어봅니다.
“포켓몬은 타입이 여러 개다.”
“응, 그렇게 써봐.”
아이가 말한 그대로를 적더군요.
“그래서 몇 개인데?”
“18개.”
“그렇게 써.”
아이는 또 썼습니다. 그리고 포켓몬의 다양한 진화법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그것도 “응 그렇게 써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글이 나왔을까요?
제목 : 포켓몬
포켓몬은 타입이 여러 개이다. 포켓몬의 타입은 18개이다. 풀, 불꽃, 물, 벌레, 노말 등등 있다. 포켓몬 중에는 진화를 하고 나면 성격이 180도 돌아가는 포켓몬이 있다. 포켓몬의 타입은 무조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데스마스처럼 타입이 두 개인 포켓몬도 있다.....(중략) 다음에 시간이 있으면 포켓몬 2로 돌아와 마저 쓰겠다.
저는 아이가 이 글을 쓸 때 첫 문장에서 잘못 쓴 ‘여러 개이다’를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받침이 없는 ‘개’가 ‘-이다’ 앞에 붙었으므로 ‘여러 개다’라고 써야 맞지만, 그냥 뒀습니다. ‘180도 돌아가는’이 아니라 ‘180도 달라지는’이라고 해야 자연스럽지만, 그것도 아이가 쓰고 싶은 대로 쓰게 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에는 보통 자신의 주장을 한 번 더 쓰고 마무리하지만 제 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그냥 뒀습니다.
맞지 않는 표현도 있고, 읽으시며 느끼셨겠지만 잘 쓴 글도 아닙니다. 그런데 뭐가 달라졌을까요? 저희 아들은 이날 열아홉 줄의 글을 썼습니다. 노트 한 페이지를 다 쓰고 뒷장 서너 줄까지 썼지요. 그나마 제가 밤이 늦었으니 자자고 말렸기 때문에 그 정도였죠. 포켓몬 2로 돌아오겠다는데 그냥 뒀으면 얼마나 더 썼을까요?
한 주제에 대해 길게 쓰는 것은 글쓰기에 기본이 되는 아주 중요한 기술입니다. 책 한 권이 나오려면 한 주제에 대해 원고지 300매 이상의 분량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날 저희 아들이 가장 만족스러워하고 자랑스러워한 부분도 분량이었습니다. 평소보다 3배는 더 많이 썼거든요. 그날 연필을 꼭 잡고 글을 쓰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나 모릅니다. 제게 보여줬던 그 정수리가 너무 예뻤어요.
저는 아이들 글쓰기 코칭을 할 때도 ‘응 그렇게 써봐’를 참 많이 써먹습니다. 그 말은 정말 마법과 같았어요. 글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아이도, 제가 낯설어 울었던 아이도, 소극적으로 수업을 하던 아이도 모두 진지하게 글을 썼습니다. 수업을 마치고는 심지어 ‘재밌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자기 글을 꼭 가져가겠다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응 그렇게 써봐”라는 허락까지 받고 쓰니 얼마나 신났을까요? 쓰고, 쓰고, 또 쓰다가 한 페이지를 훌쩍 넘겨버리면 ‘나 이런 글도 써봤어.’라는 작은 성공 경험도 갖게 되겠지요. 그 경험은 글쓰기가 어려워지거나 잘 안 풀리는 날을 이겨내게 해 줄 것입니다.
아이가 쓰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쓸 수 있게 마법을 부려주세요. “응 그렇게 써봐”하면 아이는 신이 나서 쓰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