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육아가 부담스럽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아니, 엄마가 되어서, 육아를 전담하고 있는 사람이 아이 키우는 게 부담스럽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아이를 놓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곧바로 이런 비난이 들려오는 것 같다. 그래서 이런저런 다른 말로 빙빙 돌려 본다.
“아이가 너무 고집스러워서 힘들어요.”
“아이가 성적이 안 올라서 걱정이에요.”
그러나 아이는 고집 피울 수 있고, 성적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사실 나는 아이를 키우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렵고, 그래서 회피해버리고 싶어요.”라고 말할 수 없기에.
나도 처음엔 내가 이상한 엄마라서 아이 키우는 게 어려운 줄 알았다. 평소 내 생각이나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몹시 짜증을 냈는데, 이런 성격 때문에 아이 키우는 게 힘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성격을 고쳐보려고 심리상담소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고치기는커녕 ‘나는 그런 사람이구나’ 인정만 하고 왔다. 사실 그랬다. 육아에 특별히 어려운 성격이라는 것은 없었다.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엄마도 아이의 돌발상황과 고집에 힘들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어떤 엄마는 아이 하나 이기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자신이 너무 무능력하고 바보스러워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 우는 아이 손목을 잡고 질질 끌고 올 때는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을 때도 있다고 했다. 누군가는 아이가 ‘싫다’고 말할 때 화가 뻗치기도 하고, 누군가는 아이가 울기만해서 속이 터진다고 했다. 다 저마다의 어려움이 있고 괴로움이 있다.
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다른 인격체라고 하지 않는가? 사실 육아는 ‘타인’과 끊임없이 살 부대끼는 일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한 공간에서, 그것도 매일. 정말 매일. 자괴감이 들고, 분노가 치솟고, 질문이 샘솟고, 극복을 못해 전전긍긍하고. 난 솔직히 아이를 키우며 내 밑바닥 인성을 보았다. 내가 얼마나 처참하게 ‘미친년’이 될 수 있는지 절실하게 경험했다. 어느 누가 ‘미친년’이 되고 싶은가? 어느 누가 자괴감 가득한 찌질한 삶을 살고 싶은가? 그런데 엄마라는 자리는 그걸 해야 한다. 이유 불문, 때로는 독박으로 그 힘든 걸 해내야 한다.
그러다 문득 오늘 아침에 깨달은 게 있다. 세수를 하려고 보니 내 턱 아래 뾰루지가 나 있었다. 노랗게 곪아서 손으로 짜면 금방이라도 톡하고 터질 것 같았다. 그때 아들이 양치질하러 들어왔다가 내 뾰루지를 함께 보았다.
“엄마, 이거 세수하면 금방 없어져. 나도 있었는데 세수하고 없어졌어.”
“그래? 아프지 않을까?”
“안 아파. 그냥 터져.”
그리고 아들은 무심하게 칫솔을 물고 밖으로 나갔다. 평범한 일상. 일상의 대화. 그래, 이런 게 가족이지. 같이 한집에 사는 가족끼리 하는 대화였지? (물론 이것도 애가 학교나 가야 할 수 있지만)
엄마, 자식. 어른과 아이. 가르칠 사람과 가르침 받는 사람. 보살펴야할 사람과 보살핌을 받아야할 사람. 나는 이 이분법만으로 엄마라는 삶을 바라본 게 아닐까. 우리가 같이 살고 있다는 생각을 못 한 게 아닐까? 아이도 가족의 구성원이고 나도 구성원이다. 우리는 같이 살아내고 있다. 같이 살며 서로의 인생을 공유한다. 조언하고 추억하고 어우러지면서 아들과 내가 같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가슴 한가운데 무언가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 무거운 짐 하나가 내려진 것 같았다.
‘같이 산다.’
그래 육아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같이 산다라고 생각하자. 아이를 나보다 어린, 낮은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동등한, 같이 사는 가족으로 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많은 추억을 쌓게 될 것이다. 오늘 아침처럼 이런 무심한 추억까지 포함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