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완서 작가님이 쓰셨다는 문장. “부모의 사랑은 아이들이 더우면 걷어차고 필요할 땐 언제고 끌어당겨 덮을 수 있는 이불 같아야 한다.”
나는 이 문장에서의 방점이 ‘걷어차고’인 것 같다. 어느 날 아이들 발밑에 걷어차여 쭈굴쭈굴 구겨져 있는 이불을 보며 이 문장을 생각해내신 건 아닐까. 반대로 ‘덮을 수 있는’이 방점일 수도 있다. 지치고 피곤한 아이가 이불을 어깨까지 쓱 끌어당겨 덮는 모습을 보며 이 문장을 생각해 내셨을 수도 있다.
한 번도 만나 뵙지 못 했고, 그저 동경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작가님이 쓰신 문장이니 감히 이렇다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 문장을 읽으며 그냥 상상해보았다. 나라면 어떻게 이 문장을 쓰게 되었을까를.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저마다 글의 소재나 아이디어를 얻는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엔 오래 곱씹는 것이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상황이나 생각을 주로 샤워하면서 자주 곱씹어 본다. 나는 왜 그게 마음에 걸렸을까.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할까. 그러다 어떤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다가 또는 어떤 물건을 보고, 어떤 기사를 보고, 책 구절을 보고 답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출처: 픽사베이)
만약 나였다면, 내가 박완서 작가님의 그 문장을 쓰게 되었다면, 나의 경우엔 부모의 사랑에 대한 곱씹음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아이가 내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엄마의 존재를 우습게 보거나, 부모의 사랑을 쉽게 여길 때 발동했을 것 같다. 지금의 나라면 말이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아이를 깨우러 방에 들어갔는데 밤새 걷어차서 쭈글쭈글 뭉쳐진 이불을 보고, 심지어 한 자락은 침대 아래로 아무렇게나 흘러내려진 모습을 보고 ‘아! 내 사랑이 저 모습 같구나!’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곱씹었을 것이다. ‘왜 쭈그러진 이불을 보고 아이가 내 사랑을함부로 대했던 모습을 떠 올리게 됐을까?’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불은 포근함과 따뜻함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함부로 발에 차인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숭고하고 따뜻한 것이지만 자식은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심지어 함부로 여긴다. 그러나 피곤하고 지칠 때 우리가 찾는 것은 이불이다. 무섭거나 슬플 때도 우리는 이불속에 숨는다. 아무리 걷어차여도 부모는 또다시 자식을 찾아와 덮어준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은 이불 같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면 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을 골라 문장을 만든다. 그리고 걷어차이는 상황을 먼저 쓸 것인지, 덮는 상황을 먼저 쓸 것인지 순서도 고민했을 것이다. 만약 저 문장이 ‘부모의 사랑은 필요할 땐 언제고 끌어당겨 덮을 수 있는 이불 같아야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더우면 걷어찬다.’라고 한다면 보다 냉소적인 문장이 될 것이다. 아마도 박 작가님은 따뜻한 부모의 사랑에 조금 더 무게를 싣고 싶으셨던 것 같다.
어젯밤 우리 아이들
간혹 멋진 글은 멋진 표현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경우 진솔한 마음보다는 겉치장으로 화려한 문장에만 치중하게 된다. 글에 뛰어난 표현들은 많은데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작가의 마음이나 주장이 느껴지지 않는 글들이 있다. 뭐랄까 겉표면만 핥고만 느낌이랄까. 그 안쪽의 과육은 무슨 맛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런 글을 읽으면, ‘아 한 번 더 고민했으면 저 좋은 표현이 빛이 났을 텐데’ 안타까울 때가 있다.
또 어떤 경우엔 그런 화려한 표현을 쓸 수 없으므로 나는 글을 잘 쓰는 게 아니다 또는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본다. 그러나 글이 좋으려면 마음이 담기고 작가의 생각이 담겨야 한다. 그다음이 멋진 표현이다. 16년째 글을 써서 먹고살고 있는 내 생각은 그렇다. (물론 나보다 더 훌륭한 작가님들이 훨씬 많지만)
지금의 박완서 작가님처럼 하고 싶은 말을 부연 설명 없이 문장 하나로 온전히 전할 수 있는 경지는 아무나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런 문장들에 지레 겁먹고 글쓰기를 포기하는 일도, 겉멋에만 취해 글을 쓰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경험과 생각에 충실하고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나는 좋은 글쓰기는 그 일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