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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마드 노을 Feb 01. 2024

지구 반대편에서 몸져누웠더니 생긴 일

호텔을 옮기고 나서도 현기증이 너무 심해서 다음날까지 아무것도 못하고 계속 누워만 있었다.

베개에 머리를 깊숙이 파묻고 누워있는데 흔들흔들 온 세상이 꿀렁거린다.



여기는 호텔인가 배인가.



뱃멀미를 하는 듯한 극심한 현기증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기분도 가라앉는다.

그렇게 컴컴한 동굴 같은 호텔방에 생쥐처럼 누워서 끙끙 앓고 있었다.



어지럽고 힘든 와중에 밥은 또 엄청 잘 챙겨 먹는다.

어제 아시안마트에서 사 온 것들로 한식 한 상을 차려본다.

호텔이라서 조리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해 먹으면 된다.


햇반에 모둠채소, 계란을 넣어 비빔밥을 만들었다.

보트로 끓인 뜨거운 물에 된장을 살짝 풀어서 된장국도 만든다.

팔팔 끓인 된장국은 아니지만 비빔밥 먹다가 목 막힐 때 곁들이면 나쁘지 않다.

고추장과 참기름 넣고 샥샥 비빈 비빔밥에 김자반을 솔솔 뿌려서 한입 크게 먹었다.



그 맛은.... 와 진짜 말해 뭐 해, 너무 맛있다!

조상님께 감사하게 되는 맛!



그렇게 신나게 한식을 먹었는데도 어지럼증이 가시질 않는다.

신경이 예민해져서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사람소리 차소리가 크게 느껴지고 머리가 쿡쿡 쑤셔온다.

괴롭다는 생각이 들면서 체념하듯 눈을 감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쿵짝쿵짝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으로 빼꼼히 보니, 호텔 바로 앞에서 꽤 크게 퍼레이드 행사를 하고 있었다.

대충 잠바를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퍼레이드는 너무 멋있었고 보고만 있어도 즐거웠다.  

마치 힘내라며 선물처럼 찾아와 준 것 같아서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 만약 몸이 괜찮아서 다른 곳으로 관광이나 투어를 갔다면 이 멋진 퍼레이드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몸이 아팠던 것도, 그래서 힘들어하다가 우연히 퍼레이드를 만난 것도 모두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이었다.




나는 항상 인생이 예상한 대로, 짜인 대로만 흘러갔으면 하고 바랐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이 펼쳐지면 너무 당황스러웠고 괴로웠다.

그래서 나는 매사에 겁이 많고 불안도가 높았다.


하지만 뜻밖에 펼쳐진 퍼레이드처럼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기는 것이 때로는 잊지 못할 선물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 늘 무섭고 걱정됐던 나는, 예상치 못한 일들로 인해 감사했고 행복해졌다.









퇴사를 고민하며 떠나왔던 스페인,


정년보장이 되는 지금의 회사를 계속 다니는 건 내가 그리도 바라는 '안정'을 의미했기에 결코 쉽게 놓을 수 없는 끈이었다.

그 뜨겁고 날카로운 끈에 손이 아프고 갈라져도 버리기가 힘들었다.

예상가능한 트렉에서 벗어나서 알 수 없는 곳을 달리는 검은 마라톤을 시작하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예상일 뿐이며 미래는 결코 알 수가 없다.

예상치도 못한 일이 생기는 건 너무 당연한 것이며, 중요한 것은 그걸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과 태도에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른척한다면 나는 평생 불안하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퍼레이드가 끝나고 들어와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여전히 어지러웠지만 예상치 못하게 일어난 일 덕분에 행복해진 내 마음에선 평소에 해본 적 없었던 생각이 조용히 빛을 냈다.



알 수 없다는 게
엄청 매력적인 일이 될 수도 있는 거구나.




옴마...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안정주의자, 프로걱정러, 불안순이가?


처음 와본 스페인에서 항상 낯선 자극과 마주했던 나에게 가장 새로웠던 순간은,

평소에는 해본 적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였다.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만큼이나 놀랍고 신기했다.




물론 쫄보가 한 번에 바뀌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변화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지금은 잠깐 번뜩이는 생각일 뿐이지만, 그 반짝임을 더 크게 더 잦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긴다.


작고 하찮지만, 선명한 반짝거림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내일은 약도 좀 사 먹고 영양보충을 더 해야겠다.


금은 힘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렇게 예상치도 못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예상치도 못한 새롭고 신기한 하루하루가.









<해당 글은 작년에 겪었던 일입니다. 실감 나게 쓰고 싶어서 지금 가있는 것처럼 작성된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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