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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차는 자산을 넘어서

by 놀마드 노을 Mar 12. 2025

20대 때, 오랜만에 소개팅에 나간 적이 있었다. 으레 그렇듯, 처음 보는 남자와 소개팅의 상징과도 같은 메뉴인 파스타를 호록거렸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로 이동하기 위해 소개팅남의 차를 얻어 타게 됐다.


조수석 문을 열었는데, 이게 웬일.

마치 발 달린 생물이 탄 역사가 없는 것처럼 차 바닥이 모래하나 없이 깨끗했다. 발을 들고 앉아있어야 하나 고민이 될 정도였다. 아무도 가지 않은 눈 쌓인 길에 첫발을 내딛듯 조심스레 차에 탔다.








"차를 보면 그 사람의 청결도를 알 수 있지! 그 남자, 아마 집도 차처럼 무균상태일걸?"


집에 돌아와서 소개팅 후기를 독촉하는 친구에게 전화로 이 얘길 했더니 대뜸 그랬다.

내 방을 쓱 훑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나부터도 차와 방의 청결상태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차와 집,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두 장소를 대하는 태도는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가장 편안함을 느끼며 솔직해지는 공간을 꼽으라면 단연 차와 집이다.

울고 싶은 하루를 보낸 어느 날, 차에 타는 순간 종일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을 와르르 토해내듯 꺽꺽 울었다. 원 없이 울고 기분전환으로 드라이브한답시고 나 홀로 뮤직비디오를 찍었던 기억까지 들춰내고 나서야 확실히 알았다. 이건, 편안하지 않았다면 절대 하지 못할 행동이라는 걸. 집에서 무릎 나온 수면바지를 입고 눈곱도 안 떼 채로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늘어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몸과 마음이 고단함에서 도망가고자 할 때 '집에 가고 싶다.'라는 주문을 외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공간은 아늑한 찻잔 같아서, 바짝 말라버린 주인에게 따뜻한 물과 같은 편안함을 부어서 자연스럽게 본모습을 우려낸다.

그렇게 우러난 취향과 기호는 어렵게 찾지 않아도 공간 곳곳에 스미듯 드러난다.

차에서 듣는 음악, 운전습관, 싣고 다니는 물건에서 취향과 성품을 알 수 있다. 어떤 물건을 얼마만큼 사는지, 치우고 정리하는 걸 좋아하는지, 아니면 적당히 수더분한지, 성격과 생활철학은 집이 말해준다.


그래서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듯, 내 심사가 궁금하면 공간을 살폈다.

십중팔구는 공간을 통해 마음의 모양을 알 수 있었다.

우울하거나 허전할 땐 물건을 사 나르며 주변을 채우려 했고, 복잡한 게 싫을수록 부지런히 버리고 비워냈다. 단순해지고 싶을 땐 청소를 했다. 공간의 모습에서 힌트를 얻어, 감정의 매무새를 곧추세웠다.


무언가에 마음이 동하는 건 나와 비슷한 걸 발견했을 때이며, 나는 나와 닮은 공간에서 가장 진솔했다.

그 안에서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내 마음을 마주 볼 용기를 배우고 솔직해지는 연습을 부지런히 했다.

가장 진실한 나를 귀담기 위해 자신을 탓하지 않고 이해하며 받아들였다.

공간은 소유하는 자산을 넘어, 장소라는 물리적 의미 이상으로, 함께하는 사람을 품에 안고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소개팅이 끝난 후 차를 몰고 집에 와서 방에 눕기까지, 내 공간을 이어 거치며 소개팅남이 어땠는지를 복기했다. 오랜만의 소개팅으로 달뜬 마음이 가라앉자 서서히 진심이 드러났다. 그의 지나친 깔끔함은 부담되지만, 전반적으로 괜찮았다는 생각에 한번 더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파스타를 먹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 했던 마음이 어쩐지 뻘쭘해진다. 흠, 나도 한번 더 만나보고 싶다 정도였지 엄청 마음에 든 건 아니었거든?


그 후로 며칠 동안, 어쩐지 집에 계속 쇼핑택배가 오고 주변에 물건이 늘어났다.

아, 마음에 든 거 아니라면서 왜 이래 정말! 




이 지저분한 책상은 복잡한 마음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원래 잘 안 치우는 걸까....(하하)이 지저분한 책상은 복잡한 마음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원래 잘 안 치우는 걸까....(하하)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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