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만 퇴근할게요
독일에 오래 살았지만 여태까지 '응급했던 사건'을 꼽으라면 급히 병원에 가야 했던 날들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응급으로 병원을 찾았던 게 약 세 번이었는데 두 번은 늦은 저녁과 주말 오전이었던지라 종합병원 응급실외엔 선택지가 없었지만, 나머지 한 번은 퇴근 시간쯤 상태가 좋지 않아서 병원에 가려던 날이었다.
당시 몇 달 전부터 손목 부분에 멍울 같은 게 잡히기 시작하더니 시간이 갈수록 크기가 커지고 부위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야겠다고 다짐한 그날은 컴퓨터 타자만 쳐도 통증이 느껴져서 직감적으로 징후가 좋지 않음을 느꼈다.
퇴근길에 들르려고 며칠 전 봐뒀던 정형외과에 급히 연락을 했다. 병원이 아직 문 닫기 전이고 상황이 급하니 기다려서라도 당일 진료를 볼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직원의 말투가 상당히 퉁명스러웠다.
"급해요?"
-"네, 급합니다. 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일하기가 어려워요."
"저 10분 뒤에 퇴근하거든요. 다음 주에 오세요."
-"네? 급하다니까요. 아파요."
"제가 보기엔 안 급해요. 퇴근시간이니 이만 끊습니다."
-"그럼 제가 뭐 피라도 철철 흘려야 갈 수 있습니까?"
"네 맞아요."
뚜뚜뚜.
그리고 직원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렇게 병원과 허무한 통화가 끝나자 정말 화가 났다. 독일에 살며 '정기적으로' 열불 나는 일들이 터지는데, 아마 그 해에 가장 크게 분노했던 날이었던 것 같다.
환자의 통증보다 직원의 퇴근시간이 중요한 나라, 통증의 응급성을 리셉션 직원이 판단하는 나라인 독일!
물론 그 직원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다. 독일에서 '응급하다'는 말의 의미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프거나, 말 그대로 피를 흘려 생명이 위독할 정도의 통증이어야 응급으로 판단한다. 즉 '스스로 병원에 올 수 있고 전화통화를 할 정도라면 응급이 아니니 그보다 자신의 퇴근할 권리'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이런 독일의 시스템에는 두 가지 이면이 존재한다. 객관적으로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가 돼야 응급이므로, 그 정도로 위험에 처하거나 지병이 있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진료를 받을 권리가 철저히 지켜진다. 반면 이렇다 보니 중간정도의 응급이나, 통증은 심하나 이를 악물고라도 어떻게든 참을 수 있는 정도라면 응급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일에 살다 보면 병을 의도치 않게 쑥쑥(?) 키우는 경우가 자주 일어난다.
게다가 말로 천냥 빚도 갚을 수 있는 건데 똑같은 말도 정말 얄밉게 해서 그렇지 않아도 아픈 환자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사람들이 곳곳에 빌런처럼 숨어있다.
아무튼 그날 나는 병원에 가지 못했고 (그다음 주에도 못 갔다), 다른 병원을 찾아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어 증상이 안 좋아졌다. 결국 수술 외엔 다른 방도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고, 약 한 달 뒤 독일에서 처음 수술대에 눕게 되었다.
만약 그때 직원이 나에게 바로 오라고 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과거에 만약이란 없지만 어쨌든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인데 대처가 참 아쉽고 이기적이었다는 느낌을 씻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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