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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Oct 18. 2023

굴러들어 온 돌과 박힌 돌, 텃세

독일 시골의 텃세

자그마한 독일 소도시에 살았던 적이 있다.


조용한 환경 때문인지 같은 건물에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정말 많이 사셨다. 대충 짐작해도 주민들 평균 나이가 60세는 넘을 것 같았다. 요양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우리 옆집도, 윗집도, 대각선 윗집도, 맞은편 집도 모두 75세 이상 할머니셨다. 처음에 주민들을 보고 내심 따뜻하고 인정이 많을 거라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나이 드신 분들이라면 대체적으로 인자할 거라는 게 내가 가진 스테레오타입이었다. 처음 보는 할머니들과 나는 웃으며 인사했고 마음을 여는 의미로 마주치면 내 얘기를 곧잘 들려드렸다.


어느 날, 왼쪽 옆 집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다. 새로 이사 온 사람이라고 들었다며 인사하러 왔다고 하시길래 나도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서 우리 집에 이전에 살던 할아버지 얘기를 하셨다. 그 할아버지가 괴팍하고 성격이 영 별로라서 마지못해 인사만 하고 지냈다고 가벼운 험담을 하셨고,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오히려 내가 본 할아버지 (이전 집주인이라 집 보러 왔을 때 만났었다)는 굉장히 쿨하시고 노년을 즐기러 큰 도시로 이사 가시려는 유쾌한 분이셨다. 아무튼 그 뒤에도 여러 할머니들이 우리집 벨을 누르고 우리 얼굴과 집안을 슬쩍 보고 가시는 날들이 이어졌다.


며칠이 지나 집 밖 발코니 부근에서 누가 왔다 갔다 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당시 집이 0층이라 발코니 바로 앞이 잔디밭이었는데, 그 공간은 우리 집에 속하는 사유공간이라 원래는 허락 없이 왔다 갔다 하면 안 되는 곳이다. 알고 보니 저번에 인사하신 그 할머니와 할머니 딸, 그리고 지인 분들이 아무렇지 않게 그곳을 지나다니며 우리 집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기분이 불쾌하여 한 번은 일부러 지나갈 때 눈을 한껏 마주치며 인사하니 그다음부터는 지나다니는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또한, 분명히 특정 할머니한테만 말씀드린 얘기가 다른 할머니들 귀에도 어느새 들어가서, 누구든 건물에서 마주치면 이미 내가 말한 내용을 다 알고 계셨다. 발 없는 말이 천리는 못 가도 삽시간에 건물 위아래로 옮겨 다니는구나. 그때부터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건물에 우리가 유일한 외국인이자 가장 젊은 사람, 즉 '신기한 구경거리'이자 '대화 주제의 타깃'이 되었다는 것을. 그 뒤부터 일부러 왕래도 줄이고 최대한 인사만 하고 지내려고 했다.


며칠이 지나고 왼쪽 옆 집 할머니가 벨을 눌렀다. 본인 마당 잔디를 깎을 건데, 우리 집도 깎아줄 거냐고 물으셨다. 나는 감사하지만 일부러 힘들게 수고하실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할머니는 웃으며 그래도 깎는 김에 같이 해주시겠다고 해서 내심 고맙고 작은 선물이라도 드려야 하나 고민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잔디를 보니 우리 집은 잔디가 그대로 무성한 게 아닌가. 뭐 그럴 수도 있지. 호의가 의무는 아니니까, 하고 바로 옆을 본 순간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오른쪽 옆 집의 잔디는 짧고 가지런하게 깎여있고, 우리 집만 갑자기 무성하고, 다시 그 옆 집(잔디 깎아준다고 한 할머니 집)은 가지런한 게 아닌가. ㅎㅎ 그렇다. 나한테 물어본 게 해준다는 뜻이 아니었다. '잔디기계가 시끄러워서 너한테 말을 안 할 수는 없고, 너희 집만 빼고 깎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란 뜻이었다.


이 무슨 전통 교토식 화법도 아니고, 잔디로 텃세를 부리다니.


그곳에 산 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사는 동안 우리는 아마 만인의 심심풀이 땅콩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큰 싸움까지 있었으니..


(다음 글에 계속 - 이웃과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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