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을밤 Oct 15. 2024

독일식 대화법 적응하기

독일사람과 대화하면 나타나는 특징에 관해 이전에 한차례 다룬 적이 있다. 이전 글을 먼저 보고 오셔도 좋고, 이 글만 읽으셔도 상관없다. 


https://brunch.co.kr/@nomad-lee-in-eu/174


'독일식 대화법'이라고 내가 이름 붙인 이 화법은 독일에 단기거주나 여행을 온다면 쉽사리 알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독일에 살더라도 독일인들과 접촉이 적거나 운 좋게 잘 맞는 소수끼리만 소통하면 역시 공감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독일인들과 매일 부딪히고, 함께 일을 하고, 이웃 혹은 친구로 지내고, 다툼, 고소, 소송과 같은 크고 작은 갈등을 겪어보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반드시 경험하게 된다. 


독일에서 총 13번 이사를 하고(얼마 전 책장을 정리하며 이전 서류들이 나왔다), 7개 도시에 10년 이상 거주하며 나는 이러한 특징들을 감히 <독일식 대화법>이라고 이름 붙였다. 지역과 나이를 불문하고 전반적으로 독일에서 자란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즉, 단순히 독일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이곳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1. 사과 안 하기 (잘못 언급 안 하기)

이건 이미 유명한 독일식 혹은 유럽식 화법인데, 본인이 잘못한 게 분명한 상황임에도 절대 사과 하지 않는다. 서류를 잘못 보내거나, 완전히 다른 정보를 준 당사자가 누군지 명확히 드러나고 본인도 그걸 인지하고 있지만 일언반구 잘못에 대한 언급 없이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이다. 


예)

"잘못된 서류가 첨부됐네요. 다시 확인해 주세요."

- (아무 언급 없이) 여기, 첨부파일에 있어요.


"소음이 너무 심해서 왔어요. 아이가 뛰나 봐요."

- 부모: 나 아닌데? 우리 애인 가봐요. 애한테 말해요.


"1월 15일 데드라인이 잘못된 거 같은데, 이거 맞아요?"

- (아무 언급 없이) 당연히 10월 15일이죠. 


이런 식으로 대응하는 가장 큰 이유는 혹시나 책임이 자기한테 돌아올까 봐 지레 발 빼는 것인데, 실제로 본인이 잘못한 일까지 책임을 피하려고 하니 상식적인 수준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2. 답변 안 하기 (무응답)

1번에 이어 단골 화법이다. 정확히 말하면 대화가 아니니 화법이라기보다 그들만의 대응 방식이라 볼 수 있다. 특히, 할 말이 없거나 당장 자기도 어쩌지 못하거나, 상대가 요구하는 걸 안 했는데 인정하기 싫을 때 잘 쓰는 방식으로 아무런 반응이나 답장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예) 

"욕실 수도꼭지가 고장 났어요. 수리 좀 부탁합니다."

- (2주 넘게 무응답)


"내가 저번 주에 보낸 파일 업데이트 해줄 수 있어?"

- (무응답)


이때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업데이트 좀 해달라"라고 수 차례 메일을 보내면 그제야 한 줄짜리 '기다려라'는 답변이 온다. 한 달 가까이 기다려 다시 기다리라는 메일을 받는 경험은 독일에서 매우 자주 한다. 



3. 전화할 때까지 버티기

굉장히 아이러니한 건, 메일을 대여섯 통 보낼 때 한마디도 없던 상대방이 전화로 물어보면 바로 대답해 준다. 온 전화를 끊을 수도 없고(실제로 중간에 끊는 사람도 있었음), 화를 낼 수도 없으니 그때 돼서야 자기가 아는 업데이트를 전달하는 것인데 여전히 원하는 답변(일이 처리되었다)은 못 받을 확률이 높다. 아무튼 메일보단 전화가 빠른 건 확실하다. 

 


4. 주제 직접언급 안 하기 (말 돌리기)

A에 대해 물어봤는데 B에 대해 대답하는 방식이다.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주제를 가져와서 교묘하게 진짜 질문의 답변을 피한다. 


예)

"저번에 회의에서 언급한 교육 예산이 얼만지 말해줄래?"

- 올해 보너스 많이 나갔어. 연초에 얘기해서 생각이 안 날 수도 있지만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예산이 얼마라고?"

- XXX유로야. 


즉, 두 번 이상 되물어야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있다. 예시는 짧지만 실제로는 2번과 3번까지 콜라보되어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이렇게 주제 돌리기가 이어질 수 있다. 




1, 2, 3, 4번이 한꺼번에 한 대화에서 나타나는 사례도 흔하다. 


특히 한국인 혹은 아시아인에게 소위 '분노버튼'이 되는 부분은 1번이다. 예의와 사과를 중시하는 문화권에서는 사과 한마디만 해도 상대방의 분노가 반 이상 사그라들고 대화가 유해질 수 있다. 하지만 독일에선 이러한 방식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어쩌다 사과 제대로 하는 사람을 보면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 긍정적인 인상을 받는다 (잘못하지 않은 상황에도 사과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잘잘못이 명확한 상황 한정). 사과를 안 할 거면 2번이라도 제대로 해야 하는데, 된다/안된다 빠르다/늦다 뭐가 됐든 기본적인 답변까지 안 해버리니 속에서 불이 올라올 일을 자주 겪는다. 


분노의 원인에는 내가 한국인이니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이 한국식 혹은 아시아식으로 대처하길 바라는 기대심리도 크게 작용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궁금하다. 여기서 어릴 때부터 교육받으면 정말로 저런 배려 없는 대화방식을 교육받는지. 이전에 지인이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독일 학교에서는 내 주장이 틀린 걸 알아도 끝까지 밀어붙이라고 가르친다'라고. 설령 그렇게 가르친다 해도 옳은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잘못한 일에 대해 사과하고, 책임지고 정정하는 건 함께 일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이자 도덕과 인격의 문제가 아닌가? 


불행 중 다행인 건, 독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도 부모가 독일인이 아닌 이민가정의 자녀들은 이러한 특징이 적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부모 출신국가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기 때문에 적어도 상대방이 독일인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면 그에 맞게 대처하는 것 같다. 


성인이 되어 독일 장기거주를 계획하시는 분들은 필히 위 화법을 마주할 마음의 대비를 하시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제목 사진출처: unsplash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