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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neon Aug 09. 2017

미생은 어떻게 영웅이 되는가

보흐밀 흐라발,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극장가엔 이 나라 저 나라 전쟁영화가 성행하는데 집에서 삼십 분 거리 머나먼 씨지브이까지 기어갈 여력이 없는 나는 집구석에 앉아 전쟁 소설(정확히는 전후 소설이지만)을 읽었다. 게으른 탓일 수도 있겠으나, 기왕이면 책에 나온 대사를 몸소 실천한 셈으로 치자. 


123.
그러나 지금, 드레스덴에서 피난 온 이 독일인들한테는 어떤 연민도 느낄 수 없었다. 지금 이들을 불쌍하게 여길 사람은 자신들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열차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독일인들을 향해 독일어로 한 마디 했다.
"집구석에 궁둥이나 붙이고 얌전히 앉아들 있을 일이지!"


독일어로는 어떤 느낌일지 무척 궁금해지는 이 찰진 말은, 소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의 주제를 나타내는 문장이기도 하다. 평생 체코에 살면서 체코어로 글을 쓴 작가 보흐밀 흐라발. 그는 다니던 대학이 독일군에 의해 문을 닫게 되자 공장, 보험사, 극장, 철도청, 고물상 등을 전전하며 일했다고 한다. 작년에 국내 최초 발행 후 대히트(?)를 친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주인공은 폐지 줍는 노인이고, 그보다 십 년 전에 소개되었으나 소리 소문 없이 절판된 이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의 주인공은 신입 선로배차원이니, 두 소설 모두 작가의 인생 경험에 빚을 지고 있는 모양이다.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엘리트 대학생에서 밑바닥 노동자로 신세가 뒤바뀐 작가가 전쟁에 반대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그러니 소설 속 열차장이 독일인들에게 소리친 한마디 "집구석에 궁둥이나 붙이고 얌전히 앉아들 있을 일이지!"는 너무나 솔직하고 사실적인 주제 문구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저 문단 전체를 다시 읽어보면 좀 이상한 점들이 보인다. (1) 기세 등등해야 할 독일인들은 '피난'을 온 상황이고, (2)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는 걸로 봐서) 열차장은 독일인이 아닌 텐데 (3) 굳이 '독일어'로 소리치고 있으니 말이다. 이 기이함의 실마리는 소설 속 배경에 숨어있다. 



[전쟁,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엄중이 감시받는 열차>는 1945년 겨울, 체코 어느 작은 마을의 기차역의 이야기를 다룬다. 나치가 패배를 선언했으니 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끝난 건데 마을의 공기엔 여전히 우울함이 섞여있고, 여기저기엔 공습의 흔적이 만연하다. 독일군은 여전히 오만하고 잔혹하게 사람을 부리며, 체코인은 두려움에 떨며 좌절을 느낀다. 철도역의 공무원의 일은 예나 지금이나 독일군을 위한 '엄중히 감시받는 군용열차'가 역을 잘 통과하도록 신호를 보내는 것이며, 그 업무 중에는 역시나 '독일어'를 써야 한다. 전쟁이 끝났어도 상황이 나아진 것도, 달라진 것도 단 하나 없다. 


46.
선로 옆 도랑에 죽은 말 세 마리가 버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지난밤에 독일 병사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차량 문을 열고 밖으로 내던져 버렸을 것이다. 이제 죽은 말들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처럼 뻣뻣하게 굳은 네 다리를 하늘로 쭉 편 채, 선로 옆 도랑에 처박힌 신세가 되어 있었다.



[전차역의 어리바리, 영웅으로 내몰리다]  

암울하기 짝이 없는 체코의 현실. 위대한 영웅-까지는 못 되더라도 좀 리더십 있는 사람이 나타나서 상황을 수습하고 시민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면 좋을 텐데, 주인공 밀로시는 그런 일과는 수만 광년은 떨어진 인물이다. 이제 막 철도청에서 근무를 하기 시작한 어리바리 수습사원이며, 여자친구와의 잠자리에서 실패한 뒤로 의기소침해 양팔의 동맥을 긋고 자살시도까지 했으니 말이다.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도 변변찮은 건 마찬가지. 밀로시의 상사인 열차장은 명예욕, 허영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밀로시가 존경하는 후비치카는 업무용 독일어 도장을 감히 여자 엉덩이에 쾅쾅 찍어대는 패기(?)는 있지만, 사람들이 (특히 열차장이) 혀를 내두르는 호색한에 괴짜다. 



별 볼 일 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마을. 말하자면, 당신이나 나같이 평범한 소시민이 살아가는 마을. 그러나 전쟁 상황은 영웅의 스펙을 갖추지 않은 이들도 시대적 행동을 하게끔 만든다. 미생 밀로시와 색마 후비치카는 마을 누구도 상상치 못한 일을 계획한다. 폭탄 하나를 구해와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다. 이 변변찮은 인간들이 뭐 대단한 용기가 있어서라거나 영웅이 되겠다는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독일인 조사관 앞에서도 절대 쫄지 않던 후비치카는 두려움에 하얗게 질린 채로 밀로시에게 폭탄을 건네고, 밀로시는 폭탄을 들고 숨어서 열차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에게 '열차가 오면 폭탄을 던진다' 말고는 아무런 작전이 없다. 폭탄을 던진 담에 어디로 몸을 숨겨야 할지, 도망쳐야 할지, 폭탄이 터지기나 할지, 터진다면 언제쯤 터질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심지어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폭탄을 던지는 순간에야 깨닫는다.



[영웅은 죽음으로써 탄생한다]

생각해보자, 

달리는 열차에 폭탄을 던지면 어떻게 될까.

엄중히 감시받으며 달리는 열차에 폭탄을 던진 사람은 어떻게 될까.


아, 불쌍한 밀로시! 

답이 너무나 뻔한 질문이었다. 죽음 말고는 없다. 밀로시는 폭탄을 던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자신의 죽음이 코앞에 당도했음을 깨닫고는 '아, 그래서 후비치카씨가 내 죽음을 예상하고 덜덜 떨었던 거구나-' 하고 생각한다. 이건 그가 특별히 바보라서 그런 걸까? 여자친구와의 잠자리에 실패해서 손목을 그을 정도로 한심한 인간이라서 그런 걸까?



밀로시는 열차를 기다리며 자신의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전차를 몰고 오는 독일 군인 앞에 혈혈단신으로 나가 "탱크를 돌려 돌아가라"라고 주문을 외다가 탱크에 깔려 죽은 할아버지. 그는 빈둥거리며 살기 위해 서커스단에서 공연하는 최면술사였고, 현실감각이 어찌나 없던지 전차 앞에 맨몸으로 나아갔다가 즉사한 바보 멍청이였다. 마을 사람들 절반 정도는 그의 죽음을 한심해했지만, 만약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할아버지처럼 독일군 앞을 막아서되 손에 무기를 들고 대항했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밀로시는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후회한다. 만약 본인이 할아버지를 조금 더 생각했더라면, 달리는 열차에 폭탄을 던지는 일 말고 다른 일을 감행했을 것이라고.

아, 대단한 밀로시! 


15.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이 있듯이, 사람들에게 할아버지는 루카시 증조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조그만 서커스단에서 공연한 적이 있는 최면술사였다.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최면술 공연이, 될 수 있으면 인생을 빈둥거리며 한가롭게 떠돌아다니고자 하는 할아버지의 야심만만한 노력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독일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프라하로 진격해 오던 그해 3월, 독일군에게 맞서기 위해 앞으로 나선 사람은 오직 우리 할아버지 한 사람뿐이었다. 우리 할아버지 한 사람만이 최면을 걸어, 진격해 오는 독일군 탱크를 저지하기 위해 독일군 앞에 나섰다. 할아버지는 독일군 기계와 부대의 선봉을 이끄는 선도 탱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셨다. 이 탱크 포탑에는 해골과 열십자 뼈 모양의 배지가 달린, 검정 베레모를 쓴 독일 군인이 상반신만 내놓은 채 서있었다. 할아버지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그 앞으로 걸어가셨다. 두 팔을 앞으로 쭉 뻗어 내밀고 독일 군인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뜬 채, "탱크를 돌려 돌아가라!"라는 주문을 중얼거리며 걸어가셨다.
... 마을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졌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저 바보 멍청이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우리 할아버지처럼 독일군 앞을 막아서되, 손에 무기를 들고 대항했더라면 독일이 어떻게 됐을지 누가 알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118.
이미 오래전에 이런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도 하긴 했다. 내게는 그럴만한 이유도 있지 않은가?...... "독일군은 탱크를 돌려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라."라는 최면을 걸면서, 꿋굿하게 부대 전체를 향해 혼자서 대항하셨던 우리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비록 할아버지 머리는 탱크의 무한궤도에 짓이겨져 버렸지만, 할아버지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 할아버지의 정신은 꼬리를 물고 밀려오는 독일군 부대마다, 탱크마다, 병사마다,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자신들이 공격을 위해 물러나왔고 지금은 러시아군에 의해 밀려가고 있는 바로 그곳, 독일로 돌아가라고 계속 압박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할아버지에 대해 잊고 살았었다. 만약 내가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좀 더 일찍 했더라면, 지금 이 일이 아니라 다른 일을 감행했을 수도 있었겠지.



기이한 출생, 빼어난 재주, 대범한 성격, 리더십 등- 영웅이 되기 위한 조건에 모두 미달된 채로 태어난 밀로시는, 그러나 영웅처럼 죽었다. 물론 폭탄 하나 던진다고 그가 마을을 구하는 전쟁영웅이 되는 건 아니지만 마을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용기와 당위성을 가지고 적과 공포에 대항했다. 참으로 보잘것없으면서도 위대한 사내, 밀로시의 영웅 서사. 이 소설은 곳곳에 위트가 넘치지만 사실은 참 슬프다. 특별히 잘난것도 지위도 없이 평범한 인간도 죽음을 불사해야 하는 게 너무나도 큰 비극이다. 

소설의 배경, 앞서 얘기했듯 1945년. 그러니 정확히는 전후소설인 보흐말 흐라발의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그 안에서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역사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지구 어딘가에선 밀로시같은 미생이 영웅으로 죽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소설의 결말이 더더욱 아리게 와닿는다.



134.
나는 죽은 병사가 쥐고 있던 목걸이를 낚아챘다. 달빛에 비춰보니, 작은 메달이었다. 한쪽 면에는 녹색 네 잎 클로버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행운을 가져다줍니다!'라는 독일어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 네 잎 클로버는 아무에게도 행운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그 역시 한 인간이었다. 나처럼, 혹은 후비치카 씨처럼 말이다. 특별하게 잘난 것도, 특별한 지위도 없는 그저 평범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를 쏘고 서로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곳 말고 다른 곳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만났더라면,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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