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분법 너머에 지혜와 아이디어가 있다.
"무슨 말이 이렇게 어렵지? 아, 철학은 넘사벽이야. gg. 너나 하셈"
이렇게 투덜대면 저는 대개 싸가지 없이 이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바보, 철학 개념이 엄밀해서 그렇지. 책 좀 봐라, 이 입시충아!"
이러면 더 공부하기 싫어집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돌아서면서 중얼거리지요. 이렇게요.
"좀 쉽게 쓰고 알아듣게 이야기하면 안 되냐?"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 대화가 상당히 심각한 오류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게 되네요
대략 이런 것을 '잘못된 이분법의 오류'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둘 중 하나를 골라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건 잘못된 전제에 기반한 선택지입니다. 둘 외에 다른 선택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그냥 찍지도 붇지도 않고 튀김 그대로 먹는 걸 선호하거든요.
엄밀해야 하는 것과 쉬워야 하는 것은 단칼에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반대 관계이지만 모순관계는 아니다.
즉,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수많은 '결정'을 할 때, 이 오류를 범해서 스스로 선택의 폭을 좁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개의 선택지가 주어지면, 그것이 다인 줄 알고 그 두 가지만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진정한 해결은 그 두 가지 선택지 바깥에 있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양극단을 떠나 새로운 해결책을 찾는 사고 과정은 실천철학의 본령이라고 하는 윤리학에도 적용되지요. 그 유명한 '중용'이라는 말 들어보셨지요? 동양철학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지만, 일단 서양철학에만 국한해서 보자면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매특허라고 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도 물론 '중용'(mesotes)라는 말이 있었습니다만, 그때에는 주로 '중간'을 의미했지요. 일종의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 양비론을 취한 후 적당히 타협하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기회주의적 행태'로 보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중용론'을 세우지요. 그것을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인 니콜라이 하르트만이 도식으로 설명하는데요, 한 번 보시죠.
이 도식이 의미하는 바는 최고의 지혜로운 선택 즉, 윤리적으로 가장 선한 선택이란, 양극단의 중간이 아니라(그것은 오히려 '악'입니다.) 그 양극단을 '떠난' 최상위의 선택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악에서 선으로 가는 가느다란 선은 바로 '지혜'의 고양 단계를 의미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은 아무 생각 없는 '악'과 같으며, 그것을 떠나 지혜를 발휘하여 최상의 선택을 고민할 때 중용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완전한 악을 선택하는 경우는 당연히 벗어나야 하고, 그러한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만 최상의 지혜로운 선택으로 가는 도상에서 포기하거나, 시간에 쫓기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지요.
시간과 조건이 허락하는 한 지혜를 발휘하여 저 최상의 선, 즉 중용에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그렇게 했을 때 윤리적으로도 최적의 선택을 하게 되고, 지성적으로도 특유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한 어렵지만, 고귀한 길이겠지요.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 또는 창의적 인간이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일상의 순간순간, 이분법을 가볍게 날아올라
중용의 맑은 대기 위로 지성을 날려 보내는 일이 아닐까요? 이 날려 보내는 그 시간이 바로 숙성의 시간이지요.
그리고
그러면
하고 떨어질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