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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Jun 12. 2019

리스본에서 <리스본행 야간열차> 읽기

여행자 J의 독서법

나는 여행 중 독서가 참 좋다. 그게 여행지를 배경으로 하는 책이라면 더더욱. 


3주 간의 포르투 생활을 뒤로하고 며칠 전 리스본에 왔다. 포르투가 너무 좋았음에도 리스본 여행을 기다렸던 이유는 바로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때문이다. 


리스본에서, 리스본이 배경인,  전 세계 베스트셀러를 읽을 수 있다니!


*줄거리

그레고리우스는 스위스 베른에서 고전문헌학 교수로 일하던 50대 남자다. 그는 어느 날 동네 책방에서 우연히 '아마데우 드 프라두'라는 포르투갈 의사가 쓴 책을 얻게 된다. 단숨에 프라두의 글에 매료된 그레고리우스는 안정적이던 삶을 중단하고 하루아침에 리스본으로 떠난다. 그는 리스본에 5주간 머물며 프라두의 삶의 궤적을 찾아다닌다. 


*주요 인물 소개


이 소설의 관전 포인트는 두 개다. 하나는 점점 드러나는 프라두의 격동적인 삶. 천재로 태어나 평생을 기대와 부담 속에 살아온 의사이자 혁명가 프라두는 아름다운 문장들로 자신의 고뇌를 기록했다. 다른 하나는 프라두를 알아가며 잔잔하고 고리타분한 삶을 살던 그레고리우스가 자기 자신과도 점차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모습. 





J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당일 투어 코스



①호시우 광장 : 출발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을 지루할 틈 없이 완독한 다음날, 아침 일찍 호시우 광장에 있는 맥도널드로 갔다. 

구글맵 대신 가이드북에 붙어 있던 리스본 종이 지도를 펼쳤다. 이날만큼은 15년 전 종이 지도를 들고 리스본을 활보하던 그레고리우스를 따라 해 보기로 했다. 아, 물론 여행 막바지라 데이터가 부족한 탓도 있었고. 


책에서 구체적인 지명을 언급한 지역은 크게 두 곳이다. 프라두의 집이자 병원이 있던 바이후 알투 지구, 그리고 그의 절친 조르지의 약국이 있던 바이샤 지구. 



②바이후 알투 : 프라두가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쓰던 곳



<론리플래닛-포르투갈 편>은 바이후 알투(Bairro Alto)를 '나이트라이프의 중심지'라 설명한다. 그래서인지 오전 11시에 방문한 이곳은 자갈길을 걷는 내 슬리퍼 소리만 들릴 정도로 아주 조용했다. 간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과반수가 가정집인데 다들 아직 자고 있는 건지, 아니면 주말이라 아침 일찍 외출한 건지 궁금했다.



프라두의 병원은 '루쉬 소리아누(Luz Soriano)' 거리에 있다고 했다. "창문틀의 윗부분이 모두 반짝이는 감청색 둥근 아치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파랗게 보였다"는, 앞쪽에 파란색 타일이 많이 붙어 있는 3층짜리 건물. 위치는 실존해도 건물 생김새는 100% 허구일 수 있단 생각에 큰 기대 없이 길 한쪽 끝에서부터 천천히 직진하며 양 옆을 살폈다. 


"엇, 저 파란 벽 뭐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니 벽 타일부터 문에 칠한 페인트까지 영롱한 파란색인 3층 건물을 마주하게 됐다. 감청색은 아니지만 창틀 모양까지 책에서 묘사한 것과 같았다. 그러나 "영화에서조차도 이런 긴 응접실을 본 적이 없었다"며 감탄하기엔 너무 좁아 보였다. 알고 보니 이곳은 '안조 아줄(Anjo Azul)'이라는 호스텔이었다. 


싱크로율이 더 높은 건물이 있을까 싶어 마저 길을 걸었다. 그 끝에는 놀랍게도 '세인트 루이스(Saint Louis)'라는 병원이 있었다. 



외벽이 연한 하늘색으로 페인트칠되어 있는, 산뜻한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세모 지붕의 하늘색 병원이라니. 건물 자체도 크고 주차 공간도 널찍하니 아마 프라두의 병원 크기가 이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세인트 루이스 병원을 바라보며 그 위로 아까 본 파란색 호스텔의 외관을 덧씌우는 상상을 했다. 


프라두는 이 곳에서 낮에는 진료를 보고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리며 글을 썼다. 그레고리우스는 여기서 프라두의 여동생인 아드리아나를 만난다. 아드리아나는 프라두가 죽고 난 후에도 30년 간 그의 흔적을 조금의 훼손 없이 보존하고 있었다. 


"'글을 쓰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깨어 있다고 할 수 없어.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자기가 어떤 사람이 아닌지는 더욱 알지 못하고.' 하지만 오빠는 아무에게도 글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그레고리우스와의 첫 만남에서 아드리아나가 한 말이다. 


사람에게 글쓰기가 그토록 중요한 일이라면 왜 프라두는 생전에 자신의 글을 꼭꼭 숨겼을까. 내면의 깊은 곳까지 숨김없이 담은 격정적인 글들이 일으킬 사회적 반향이 두려웠던 걸까. 아니면 너무나 사적인 기록들이 불특정 다수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부끄러웠을까. 예를 들면 독재 정권 밑에서 일하던 사람이 죽음의 기로에 선 채 자신의 병원을 찾아왔을 때 거절하지 못하고 수술을 해준 것, 혹은 분신과도 같던 친구 조르지와 같은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에 대한 죄책감을 토로한 그런 글들.


집에서는 가문을 책임질 천재 장남, 병원에서는 환자들에게 존경받는 뛰어난 의사 역할을 해야 했던 프라두에게 글쓰기는 솔직하게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에게 글은 돈이나 유명세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르지와 사이가 틀어지며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프라두는 더더욱 자신의 방에 갇혀 글을 썼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좋은 터에 약국을 사줄 정도로 사랑했던 친구 조르지. 생각난 김에 그 터를 보러 갔다.



③바이샤 : 조르지의 일터이자 프라두가 사랑했던 곳



바이샤(Baixa)는 바이후 알투에 비해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다. 대형 쇼핑센터도 있고, 레스토랑과 카페도 몇 미터 간격으로 줄지어 있다. 조르지의 약국이 있었다던 '사파테이루스(Sapateiros)' 거리는 번화가의 중심에서 벗어난 뒷골목이었다. 


"헐... 약국 있다...!"



외관은 평범했다. 리스본 어디에서나, 아니 포르투에서도 본 것 같은 네모 반듯한 약국. "문과 창틀은 어두운 초록과 금빛으로 칠해져 있었다. 문 위에는 클레피오스의 지팡이가, 창문에는 구식 저울이 걸려 있었다"는 묘사에 들어맞는 게 하나 없는 외관이다. 


거리의 끝까지 갔다가 근처 다른 거리들까지 샅샅이 둘러보았지만 책 속 조르지의 약국과 비슷한 분위기의 건물은 없었다. 나무 조각상이 주렁주렁 달린 어두운 초록색 문의 건물 하나를 보긴 했는데, 이곳은 밤에 스트립쇼가 열리는 클럽이란다. 


다시 사파테이루스 거리의 약국 앞에 섰다. 조르지는 진열대 뒤에서 종일 '담배를 피우는' 약사였다. 항상 각 잡힌 모습으로 완벽주의를 추구했던 의사 프라두와 대비되는 태도다. 중등학교에서 두 사람을 가르쳤던 바르톨로메우 신부는 "조르지는 여러 가지 점에서 아마데우와 완벽하게 반대였소. 난 아마데우가 완전해지기 위해 조르지를 친구로 선택했단 생각을 하곤 했지. 조르지는 아마데우가 맹렬한 속도를 늦추고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게 해주는 친구였소."라고 그레고리우스에게 말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빠른 속도로 직진하는 삶을 살던 프라두에게 조르지는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쉴 수 있는 나무 그늘 같은 존재였다. 둘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긴 뒤 그늘을 잃은 프라두는 열기를 견디다 못해 조르지의 약국에서 도보로 15분이면 갈 수 있는 '아우구스타(Augusta)' 거리에서 쓰러진다. 



50년 전엔 어땠는지 모르지만 2019년의 아우구스타 거리는 파라솔과 플라스틱 테이블로 가득하다. 선글라스나 모자를 쓴 관광객들과 그들의 관심을 얻으려 애쓰는 식당과 카페 직원들로 북적인다. 거리 초입에서 파라솔, 테이블, 의자, 그리고 관광객들이 없는 아우구스타 거리를 상상해보았다. 이 길 끝에는 아치형 조형물이 있는데, 그 사이로는 맑은 하늘과 맞닿아있는 테주강이 보인다. 마치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관문처럼 느껴진다. 프라두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④코메르시우 광장 : 테주강을 보며 마무리 



하지만 막상 이 조형물을 지나고 나면 가이드북에서 "'유럽 최대 규모의 광장'이라는 타이틀을 두고 많은 경쟁자와 신경전을 벌인다"라고 설명한 코메르시우 광장이 나올 뿐이다. 며칠 후 큰 축제를 열기 위해 싹 정리해놓은 것처럼 아무것도 없다. 강 쪽을 보아도 시선에 걸리는 것 없이 뻥 뚫려 있다. 



광장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그레고리우스를 떠올렸다. 연고도 없는 외국인 의사의 글과 삶을 연구하기 위해 30년 넘게 선 교단을 떠난 그레고리우스. 그는 자신의 삶에 특별한 불만은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쳇바퀴 같은 일상에 지쳐 있었다. 내면 깊은 곳에서는 쳇바퀴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가 자라고 있었고, 우연히 만난 프라두의 글이 불을 지폈다.  


"원하지 않는 무엇인가에서 떠나는 그런 행동이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필연적인 첫 발걸음입니다."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저자 파스칼 메르시어가 한 말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본으로 떠남과 동시에 삶의 주체성을 갖게 됐다. 그는 타인이 씌운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던 프라두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봤다. 여행을 마치고 베른으로 돌아온 그레고리우스에겐 더 이상 자기 자신과의 거리감이 존재하지 않았다. 





시내 중심에 있는 호시우 광장에서 시작한 일정은 강이 내다보이는 넓고 휑한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끝났다. 그레고리우스의 동선대로 프라두와 조르지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던 장소를 차례로 다녀왔다. 이제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총천연색의 시각적인 이미지와 함께 내 기억에 각인됐다. 리스본의 거리 곳곳을 배경으로 하는 이 이미지들에는 프라두와 조르지가 있고,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가는 그레고리우스가 있다. 


나는 하루 만에 리스본이 너무나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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