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4일
시카고 다운타운을 거닐다 보면 가장 화려한 건물들은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싸여 낡거나 초라한 게 아니라 웅장한 랜드마크로 존재감을 뽐낸다. 그중에도 해가 질 때즈음부터 간판에서 오색찬란 전구들이 빛나는 건물들이 있는데, 바로 극장들이다.
여느 도시를 잠 못 들게 하는 네온사인과는 다르다. 가까이서 보면 작은 조명들이 조롱조롱 모여 주홍빛을 내는데, 화려하지만 쨍하지 않다. 커다랗고 반짝반짝한 간판들을 달고 있는 그 건물들은 극장이었다.
'브로드웨이(Broadway)'는 물리적으로 미국 뉴욕시의 맨해튼을 가로지르는 큰길을 의미하나, 극장이 몰려 있는 타임스퀘어 근처를 이르기도 하지. 그런데, 시카고에도 브로드웨이가 있다. 아까 말한 다운타운의 극장들을 한 데 묶어 '시카고 브로드웨이'라 부른단다. 실제로도 뉴욕 브로드웨이의 유명한 공연들은 시카고에서도 여러 번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그 무대 중 하나를 관람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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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서 지내는 한 달 중 첫 일주일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J와 함께 여행하게 됐다. 나는 시간이 많은 장기여행자지만, J는 5일밖에 관광할 시간이 없어 웬만하면 J의 위시리스트에 동행하기로 했다. 리스트 맨 위엔 '뮤지컬 보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땐 연극 동아리의 일원이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꾸준히 페스티벌이나 콘서트를 비롯해 각종 공연을 즐기는 게 취미인, 나보다 훨씬 활동적인 친구였다. 덕분에 혼자라면 선뜻 안 할 경험도 하고, 좋지 뭐.
근데 가격은 안 좋아. J와 극장들 홈페이지를 둘러보는데, 뮤지컬을 보려니 웬만한 좌석은 1인당 10만원을 훌쩍 넘었다. 여기에 세금까지 붙으면...? 어우, 어질어질해. 한참을 망설이다 그냥 현장구매에 도전하기로 했다. 유학생 친구 H 말로는 공연 당일에 극장에서 표를 사면 훨씬 저렴할 거란다.
그래서 애매한 수요일 오후 시간대에 'Nederlander Theatre'에 갔다. 동명의 극장을 뉴욕에서 봤다면 둘 다 같은 인물 - 미국의 유명 공연 프로듀서 'James. M. Nederlander' - 의 이름에서 따온 게 맞다. 시카고의 Nederlander Theatre는 원래 'Oriental Theatre'란 이름의 영화관이었다. 그러다 1970년대에 문을 닫았고 1990년대에 이름을 바꿔 다시 문을 연 것이다.
오후 1시에 극장 티켓오피스에 갔더니 30분 후 뮤지컬 <해밀턴> 공연이 있단다. J와 나 둘 다 이름만 들어본 작품이었지만 사실 무얼 보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괜찮은 가격에 무대에서 너무 멀지 않은 자리에서 볼 수 있냐가 중요했다. 푸근한 인상에 금색 안경테가 잘 어울리는 직원분은 G열 중앙에 두 자리가 있는데 총 98달러라고 차분히 말했다. 엇? 잠깐... G열이면 앞에서 일곱째라는 거고, 총 98달러면 한 사람당 49달러, 그러니까 우리나라 돈으로 6만원 조금 넘는 건데? 그 표 당장 주세요, 저희가 사겠습니다.
얼떨떨하게 극장에 도착한 지 10분 만에 티켓을 현장에서 샀다. 우왕좌왕하다 극장 안이나 구경해 보자고 했다. 온갖 화려함으로 무장한 곳이었다. J와 나의 복장 빼고는 극장 안의 모든 게 고급스러웠다. 오늘 바로 공연 볼 줄 알았으면 좀 신경 써서 입고 올 걸 그랬지. 그러니까. 그래도 신나지 않냐? 당연하지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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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안에 들어가니 2층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우리의 좌석은 1층의 '오케스트라 센터'였고, 무대가 한눈에 들어오면서도 배우들의 표정까지 잘 보이는,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좋은 위치였다.
공연은 인터미션 포함 3시간 정도였는데, 지루할 틈이 없었다. 뮤지컬을 잘 알진 못하지만, 이런 형식의 뮤지컬은 처음 봐서 신기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연대기가 극의 내용인데, 절반 이상의 넘버가 무려 '힙합'이다. 일반 대사는 거의 없고, 랩이나 알앤비로 극을 진행한다.
오케스트라에도 기타나 베이스가 포함돼 있어 힙합 공연과 일반 뮤지컬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공연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역사적인 내용을 다루는데도 음악이나 극의 구성이 트렌디해서 놀랐다. 예를 들면, 등장인물끼리 정치적 이슈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걸 프리스타일 랩배틀처럼 연출했다.
*새롭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찾아보니 <해밀턴>은 2014년에 초연 이후 수없이 뉴욕 브로드웨이를 들썩였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었다. 그 신선한 방식의 공연이 오랫동안 대중 앞에 서며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듯하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몇몇 넘버들이 귀에 맴도는 것 같아 찾아봤더니, 디즈니플러스에서 공연 전체 영상을 볼 수 있었다. 랩배틀로 보이던 정치적 언쟁이 무슨 내용이었는지 자막 달린 영상을 보며 그제야 온전히 이해했다. 여행의 여운이 실선으로 쭉 이어지지 않고 희미한 점선처럼 한참을 잊고 살다가 또 이렇게 불쑥 나타나기도 하네. 여행이 여행지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일상에도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준다는 게 기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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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을 보고 나선 유학생 친구 H까지 합류해 다운타운에서 저녁을 먹었다. J와 나에겐 소소한 공연 뒤풀이였고, 수업과 팀플에 시달리다 겨우 탈출한 H에겐 하루의 보상 같은 식사였다. 명분은 이만하면 됐고, 메뉴는 미국에 왔으니 스테이크 어때? 좋지. 'Havana Grill'이라는 쿠바식 스테이크 하우스가 있길래 냉큼 들어갔다.
오징어 샐러드에 두 가지 종류의 치마살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샐러드는 구운 오징어 때문에 따뜻하고 감칠맛이 났다. 스테이크도 질기지 않고 부드러워 먹기 편했다. 여기에 칵테일 두 잔을 곁들이니 총 140달러 좀 넘게 나왔다. 미국에선 아무리 흥이 나도 추가 주문은 자제하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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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언니가 그랬는데, 밥 먹고 나서 15분만 걸어주면 지방이 덜 쌓인대. 불필요한 칼로리가 바로 연소돼서. 아니, 땀도 안 나는데 그게 말이 되냐. 아니, 어차피 걸을 건데 기분 좋게 산책하면 더 좋잖아.
그렇게 벌써 익숙해진 시카고 강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어느 도시든 야경은 건물들이 뿜어내는 빛 때문에 찬란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안의 모습은 퇴근하지 못한 직장인들의 집합소이려나...
강 따라 즐비해있는 식당 중 아무 곳이나 골라 야외석에 자리 잡았다. 맥주 세 잔에 츄러스를 주문했다. 단언할 순 없지만, 시카고엔 라거보다 IPA 맥주가 흔하다. 어딜 가든 맥주 리스트를 보면 라거가 없거나 한두 개다. 심지어 그 라거조차도 꽃이나 과일향이 날 때가 많아 당황스럽다. 이날도 자몽인지 오렌지인지 모를 향이 났지만, 야외 맥주는 맛보다 분위기로 마시는 거니까 괜찮았다. 종이 신문을 접시 삼아 내준 츄러스도 투박한 느낌이라 정이 갔다.
J와 내가 뮤지컬에 대한 감상을 밝은 표정으로 늘어놓으면 H가 취준의 고단함과 유학생의 서러움을 격양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맥주가 줄어들수록 헛소리와 웃음은 늘었고, 이렇게 보니 여기가 을지로 같다느니, 한강 같다느니 실없는 이야기로 또 한참을 보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미래에 이 순간이 엄청 그리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혼자 여행이 익숙한 나에게 이날의 모든 게 그랬다. J와의 뮤지컬 관람, H까지 셋이서 함께한 스테이크집에서의 식사, 그리고 시카고 강을 바라보며 맥주집에서의 수다까지. 좋은 공연과, 맛있는 음식과, 오래된 친구들이 선물한 마냥 즐겁고 편안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