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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Dec 03. 2023

낮엔 걸어서, 밤엔 배 타고 구경하는 건축의 도시

2023년 10월 5일

시카고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수식어는 'windy city(바람의 도시)', 그리고 'city of architecture(건축의 도시)'다. 단어 그대로 바람이 많이 불어서, 또 유명한 건축물들이 많아서 생긴 별명이다. 전자는 며칠간 시카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충분히 알게 됐다. 후자는? 인터넷으로 얄팍하게 예습해 온 걸로 호기심만 잔뜩 충전한 상태다. 


일부 내용을 공유하자면, 시카고 건축 센터(Chicago Architecture Center)에서 뉴스로 '시카고가 건축에 미친 다섯 가지 영향'이란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 다섯 가지란 아래와 같다:

1. 고대 그리스 및 로마 양식의 건물을 지었다. 

2. 강 위로 철근 다리들을 만들었다. 

3. 가정집의 공간들을 문으로 단절시키지 않았다. 

4.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층 건물이 많다. 

5. 호수 앞의 여러 건물들이 특이한 광경을 자아낸다. 


1, '고대 그리스 및 로마 양식의 건물'은 여행 4일 차, 워킹투어에서 일부 확인했다. 시카고 미술관(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시카고 문화센터(Chicago Cultural Center), 과학산업박물관(Museum of Science and Industry) 등의 고풍스러운 양식의 건물들이 그 예다. 파리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건축가들이 보자르(Beau-Arts) 건축 양식으로 도시 곳곳에 건물을 세운 거다. 


그럼 나머지는? 이날 낮밤으로 건축투어를 다니며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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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지막이 집에서 나서 도착한 곳은 프레더릭 C. 로비하우스(Frederick C. Robie House) 앞이었다. 이 집을 지은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시카고에서 설계한 건물들을 돌아보는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누구냐. 그는 미국의 근대 건축가로, 70여 년 동안 주택, 학교, 교회, 공공건물 등 다양한 건물들을 설계했다. 대표작인 구겐하임 미술관과 낙수장을 포함해 그가 설계한 건물이 무려 여덟 개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날 투어의 시작점인 프레더릭 C. 로비하우스(이하 로비하우스)도 그중 하나라고. 위스콘신 주에서 나고 자란 그는 시카고에서도 건축 일을 오래 했단다. 


뉴욕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 (출처: 공식 홈페이지)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낙수장(Falling Water), (출처: 공식 홈페이지)


투어 참가자는 건축가와 건축가 지망생들을 포함해 총 열 명이었다. 가이드는 머리칼이 희지만 꼿꼿한 체형의 할아버지셨는데, 이번에도 이름이 톰이라길래 깜짝 놀랐다. 혹시 시카고의 가이드들은 모두 톰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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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하우스는 건축물이라 생각하면 크지 않지만, 가정집이라고 생각하면 엄청 넓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디테일 하나하나에까지 엄청 신경을 쓰는 건축가였다. 바닥에서 창문을 거쳐 천장까지 이어진 나무틀은 정교하고 간격이 딱 맞았다. 


창문에는 과하지 않은 문양을 새겨 집안 분위기와도, 바깥의 자연과도 어울리게 연출했다. 치밀한 계산을 통해 설계된 집이라는 게 느껴졌다. 찾아보니 그의 건축은 '유기적(organic)' 스타일이라는 설명이 많았는데, 자연을 비롯한 주변 환경에 녹아들게, 또 안팎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게 설계한단 뜻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시카고의 건축적 영향 세 번째인 '가정집의 공간들을 문으로 단절시키지 않는다'는 게 바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물들에서 비롯된 거다. 실제로, 로비하우스엔 화장실이나 작은 옷방을 빼면 문을 거의 못 봤다. 거실에서 부엌으로, 게스트룸으로 자연스레 이동하는 구조였다. 


프레더릭 C. 로비하우스의 외부와 내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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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 프로그램의 첫 파트인 로비하우스 구경이 한 시간 반 만에 끝났고, 다음 파트는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알아서 시카고 대학 주변의 건물들을 구경하면 된다. 캠퍼스는 정말 넓었고, 청량하고 활동적인 에너지로 가득했다. 제각각 다른 디자인의 건물들도 멋있었고, 곳곳의 나무와 잔디밭도 보기 좋았다.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건물들의 건축적 의의를 알아보는 게 셀프 투어의 목적인데, 어쩌다 보니 캠퍼스 감상 시간이 되어버렸다. 


사실 시카고 대학의 건물들이 건축적으로 유명한 건 고딕 양식의 높은 건물들로 둘러싸인 광장들 때문이라는데, 자꾸 눈으로 보는 건물보다 몸으로 느껴지는 캠퍼스의 에너지에 집중하게 됐다. 이러나저러나 외국인 여행자는 즐거우니 됐다. 


날이 흐려도 예쁜 시카고 대학 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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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엔 보트투어를 신청해 놨다. 시카고는 건축물도 야경도 예쁘기로 유명한 도시니 배 위에서 천천히 구경할 수 있다면 너무 좋지.


그 기분 좋은 상상에 추위라는 변수는 생각지도 못했다. 분명 낮엔 따뜻했는데 오후에 부슬비가 내렸다 그쳤다 하더니 공기 자체가 축축해졌다. 해가 지니 외투 없이는 야외에 있기 힘들었다. 시카고 강을 따라 배 위에서 구경하는 야경은 끝내주게 에뻤는데, 얼굴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바람이 느껴져 정신이 혼미했다. 그렇다고 선실 안으로 들어가면 경치가 잘 안 보이니 40달러 넘게 주고 표를 산 관광객은 밖에서 버티는 수밖에 없다. 돈 많이 벌자 진짜...


친구들이랑 한 시간 반을 오두방정 떨며 귀로는 가이드의 설명을, 눈으로는 어두워질수록 찬란해지는 시카고의 야경을 담았다. 보트는 시카고 강을 따라 왕복 코스를 운행하며 50개 이상의 건물을 구경하게 해 준다. 가이드가 건물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건 아니지만, 시카고가 작은 동네에서 거대 도시로 성장하게 된 역사와 그 과정에서 주요 역할을 한 건물들을 소개해주니 춥긴 해도 지루하진 않았다. 130년에 걸쳐 산전수전을 겪으며 참 많은 이야기가 쌓였구나, 시카고는. 그 안에서 나 역시 이야기의 한쪽을 써 내려가고 있고.


보트는 여러 개의 다리 밑을 지났고, '네이비 피어(Navy Pier)'라는 미시간 호 앞에 매립된 지역 앞에서 잠시 멈췄다. 관람차의 빛이 주변의 시설들을 밝혀 낭만적인 뷰를 완성했다. 이렇게 나는 배 위에서 '시카고의 건축적 영향' 중 나머지 세 개를 확인했다. 


이 도시는 철근으로 된 멋진 다리들이 있고(두 번째), 저마다의 스타일로 우뚝 서 있는 고층 건물이 흔하고(네 번째), 미시간 호와 붙어 있어 이색적인 뷰(다섯 번째)를 선보인다. 괜히 건축의 도시라 불리는 게 아니구나. 


보트투어의 시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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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투어가 끝나고 친구들과 경직된 몸을 녹일 곳을 찾았다. 처음엔 공연장이 있는 큰 바에 갔는데, 스탠딩석만 있다고 해서 미련 없이 나왔다. 지금까지 얼음판에 서있었는데 또 서있으라고? 절대 못해.


근처에 'Tortoise Super Club'이란 재즈바가 있길래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자리가 있다고 해서 들어갔고, 운 좋게도 무대 바로 앞의 테이블이 비어 있었다. 


화이트 와인 두 잔에 레드와인 한 잔, 그리고 미트로프를 주문했다. 얼었던 손발과 입이 점점 풀어지며 수다의 사이클이 시작됐다. 보트투어 얘기로만 30분이 지났고, 무대에 연주자 세 명이 오르며 우리의 수다는 일시정지됐다. 


연주자분들은 모두 백발이었고, 차림새가 단정했다. 셔츠에 슬랙스를 입었고, 여기에 멜빵이나 넥타이를 더해 밋밋하지 않았다. 연주들은 안정적이었고, 그래서 듣기에 편안했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췄다는 게 느껴졌다. 쇼맨십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 연주자들은 악보와 악기에만 열중한 모습이었다. 이상하게도 난 이 장면에 매료됐다. 웃는 표정이 아닌데도 연주하는 게 즐거워 보인다. 곡 중간에 서로의 얼굴을 본다거나 하지도 않는데 끈끈한 팀워크가 느껴진다. 


연주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뒤엉킨 소음 속에서 우리도 신나게 떠들었다. 시끌벅적했지만 기분 나쁘게 시끄럽지 않아 좋았다. 와인과 재즈로 마무리하는 하루는 따뜻하고 즐거웠다. 


잊지 못할 재즈바에서의 공연과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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